나의 애송 시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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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7-16 15:41 조회1,5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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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애송시 3편
1. 자화상(自畵像)
서정주(1915년 5월 일팔일~2000년 12월 24일 85세로 별세)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나는 ‘국화 앞에서’ 라는 시조 하나만으로도 시인 서정주를 좋아한다. 친일파니 친 전두환이니 하는 놈들을 무시하고 좋아한다. 토착왜구니 하는 말을 서스럼 없이 하는 놈들은 친북, 친 김정은 아닌가? 뭐가 더 잘난 게 있는가? 진보라고? 서민을 위한다는 놈들이 한 꺼풀만 벗겨보면 더 탐욕스럽고 더 썩어빠졌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놈들보다는 타고난 천재 시인 서정주가 훨씬 좋다. 세상에 털어 먼지 안나는 놈이 없다는 말을 할 것도 없이….
내가 환갑 처음 본 이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내게 가장 아프게 꽂힌 구절은 단연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는 부분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란다. 23살에 우리는 뭘 아는가? 당시에는 80%를 8할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난 40년 ‘통역’이라는 작은 일에 매달려 살아오다 내 나이 60 넘어 은퇴 전에 돌아보니 60 해 동안 나를 끌어온 것도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
2. 오늘 두번째로 소개하는 ''고목 소리 들으려면''이라는 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퇴임 후 적폐청산 대상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고 있지만 그의 후임은 그보다 나을 게 있는가? 그 후임의 말년을 지켜볼 일이다.
고목 소리 들으려면
조오현 승려, 시인 (출생 1932년, 경상남도 밀양 - 20일팔년 5월 26일 86세로 별세)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으려면
속은 의례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20일팔년 8월 정년을 앞두고 돌아보니 잘 살지는 못했으나 대과없이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데 이 시처럼 나는 속은 썩고 가지들은 부러져 있었다. 내 굽은 등걸에 맞은 자국도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상처들은 내 적이 아니라 내가 키우고 돌보았던 사람들이 가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퇴임 후 1년 더 학교에 남아 개교 4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도 “저 이가 퇴임 후를 노리는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고 학교 예산 지원이 없어 졸업생들에게 기부금을 걷고 업계와 중국협회에서 지원금을 받아 학교 구좌에 입금시켜 결재를 거쳐 집행을 하는 데도 “부정을 하고 있지 않나”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다. 2019년 6월 행사 직전 내가 무보수로 자리를 지켰던 학교 부서에서 관리 부실이 드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문제를 제기해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내가 저지른 부정이 없었음이 드러나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 내 고목나무에는 또 큰 상채기가 남았는데도.
그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학교를 떠난 지 1년이 다 된 2020년 6월, 이번에는 제일 가까웠던 제자가 내 나무 등걸에 마지막 상채기를 냈다. 다른 핑계를 댔지만 그 이유는 명백하다. 무슨 핑계를 대고 트집을 잡았어도 그 이유는 한마디로 현직에서 물러난 나한테서 더 이상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게 세상이요. 인심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내 부덕의 소치로 돌리고 소란을 덮었다. 퇴임한 나는 잃을 게 없지만 제자는 갈 길이 멀기에… 그 때 나는 이 시로 위안을 삼았다. 이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더 이상 날 상처 낼 사람은 없다.
3. 귀천 천상병(千祥炳, 1930년 1월 29일 ~ 1993년 4월 28일 63세 별세)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생계를 위해 부인이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다.
혹독한 고문 후유증을 겪으며 좋아했던 막걸리도 평생 실컷 마셔보지 못하고 떠난 그가 죽어 하늘로 돌아가서는 이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증언하겠다는데 평생 하고 싶었던 통역을 실컷 40년이나 하고 돌아갈 내가 그 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난 이 시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 통역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재미있었더라고 말하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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