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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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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1-23 13:15 조회1,8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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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 소고    (차남 중철의 시각 2020. 01. 07)

 

2019 12 30일은 일진이 나쁜 날이었다. 오전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지난 23년 이상 함께 일한 회사의 대표가 오랜만에 전화하면서 나쁜 소식이라고 했다. 번역 발주처의 재정상황이 나빠 모든 번역서비스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나? 청천벽력이었다. 기계번역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줄 짐작했지만 하루 아침에 그런 통보를 받다니신년 1월 말까지만 번역하란다. 그 일을 하던 후배, 제자들이 졸지에 20년 만에 백수가 된다? 나도 매일 할 일이 있어 작은 보수라도 사회참여기분으로 주말도 없이 감수를 해왔는데 이제 그 끈이 떨어지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여파가 이런 걸까?

 

2018 8월말 정년을 맞이했고, 1년 더 학교에서 백의종군하다가 2019 8월 말 학교를 떠난 지 4개월, 이 노병의 일과가 바뀌는구나, 드디어. 억지로 연장한 정년 후 생활이 이제는 끊기는구나이런 생각 저런 상념에 잡히면서도 더 나쁜 소식이 올 줄은 몰랐다.

 

20년 계속된 日課의 중단이 무슨 의미인가를 반추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6시쯤 막내조카가 할아버지의 위독함을 알려왔다. 지난 24일 위급소식을 듣고 가방을 꾸려 고향에 갖다 놓았기에 추가 짐만 챙겨 서울역에서 KTX를 탄 시각이 9.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니 11시 반, 병상에 가보니 코에 호스를 끼시긴 했지만 코를 고시면서 건강하게 주무시는 것으로 보였다. 형수님과 간호원이 몸을 만지며 깨우니까 눈은 뜨고 , 을 외쳐 침대를 높여 물 한두 방울 드렸지만 사람은 못 알아 보시고 힘들고 귀찮은 눈치셨다. 마지막으로 병상에서 간호원의 도움을 받으며 커튼을 치고 소변을 보시기도 했다. 

 

당장 큰 일은 없을 것 같아 가족 5명이 옆 방에서 취침준비를 했다. 자정 전에 돌아가시면 내일이 이틀 째가 되니 3일 장은 힘들고, 미국 사는 동생네도 와야 하니 최소 4일 장이라는 얘기를 나누며 자정을 넘기고 잠을 청했다. 형님 전화의 벨 소리를 듣고 병상으로 달려간 시간이 오전 2. 부친은 잠든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계셨다. 당직의사가 조금 늦게 봐 미안하다고 하면서 약 10분 후인 12월 그믐날 오전 2 28분 별세를 선언했다. 1922 2 26일 태어나셨으니 만 98, 내년 2월이면 100세에서 1년 빠지는 白壽宴을 하자고 했는데.. 난 그 자리에서 내 어릴 적 당신이 부르시던 해운대 엘리지를 불러드릴까 했는데….  

 

 

 

해운대 엘리지        작사 손석우 손인호 노래

 

1.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2.    백사장에서 동백 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어렸을 적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2절 마지막 두 소절이다.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나는 부친이 취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 노래만큼은 불콰한 가운데 부르셨으리라. 어떤 친구는 내 부친이 카리스마가 넘쳤다고 했다. 180이 넘는 키에 늘씬한 체격. 양복이 잘 어울려 대구 시내 단골 양복점에서 맞춘 양복이 수십 벌 자개농장에 걸려 있었다. 고동색에 흰 점이 박힌 콤비 양복 윗도리를 보여주면서 이 옷은 눈 올 때 입으면 최고라고 하시는 말씀 듣고 난 두 손을 들었다. 지금도 4-50대에 더블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최민수 부친 최무룡이 무색하다. 정말이다.

 

 

 

1 1일 막내조카가 기자로 있는 조선일보의 부음을 보니 다음과 같은 최장의 부고가 떴고, 나는 이번 행사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곽래영 삼흥산업 대표 별세, 곽보익 TBC대구방송 이사·곽우진·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명예교수·곽동훈 쓰리엠 미국 본사 본부장 부친상, 남봉우 남외과의원 원장 장인상, 곽정렬 외교부 정책기획담당관실 서기관·곽석렬 우아한형제들 변호사·곽창렬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기자·곽준렬 포스코아메리카 과장·곽정민 뱅크오브아메리카 서울지점 부부장·곽예진 재미 약사 조부상, 남지민 노사발전재단 경영기획팀장·남현재 대구 W병원 수부외과 부장 외조부상, 권숙도 통일교육원 교수 처외조부상=31228분 대구 모레아장례식장, 발인 38, (053)801-9999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1/2020010100077.html     

 

 

 

도대체 이런 아들과 손자를 길러놓으신 분이 왜 그렇게 항상 분노에 차 계셨을까? 자손들은 당신이 옛말처럼 일소일소, 한번 웃고 한번 젊어지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당신은 일로일소, 한번 화내셔야 한번 젊어지시는 것으로 보였다.

 

당신 분노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보자.

 

1.         그는 시골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중학진학을 못했다. 당시 시골의 한량이었던 무식한 할아버지가 장남의 소원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할배가 밉다. 부친이 중학이상의 학력을 갖췄다면 당시에는 기회가 무궁무진했으리라. 선생이나 학자, 법관이나 변호사, 장관이나 국회의원도 가능했으리라. 그의 명석한 두뇌, 뛰어난 기억력과 치밀한 분석력은 장군감이셨다. 다만 그 능력을 발휘할 대상이 없었다. 아깝다. 정말 아깝다. 

 

2.         중학진학을 못하고 고향에서 보낸 그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 그는 어느 날 나 어릴 때 참 배 많이 곯았다. 큰 집에 가서 아침 내내 주위 쇠똥을 주어 모아 갖다 주면 겨우 피죽 한 그릇 얻어 먹었다. 한창 때 그렇게 굶었는데 이렇게 키가 큰 게 이상하다고 슬픈 듯 말씀하셨다.  이 말은 그의 모친 권 할매가 우리에게 한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배고픈 것이다.” 부친을 닮아 덩치가 큰 나는 군대에 가서 훈련하는 도중 덩치 작은 동료들보다 더 배가 고파 유사한 경험을 했을 뿐이다.

 

 

 

진성 보릿고개/ 작사 진성/ 작곡 김도일/ 노래 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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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아버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아버님의 한숨이었소

 

 

 

*아야 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아버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아버님의 한숨이었소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아버님의 통곡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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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사업으로 번 돈을 셋째 동생의 학비에 기꺼이 썼다. 동생은 서울공대 건축과를 졸업해 현대건설에 입사, 정주영의 왼팔이 되었다. 하지만 아들들은 맘대로 되지 않았다. 방송에 관심이 많았던 장남은 서울에서 재수 후 외대의 한 희귀언어 과에 들어가는 바람에 평생 불만거리가 되었을까? 경북 중 졸업 때 전교 4등으로 금메달을 탔던 차남도 재수를 해보지도 않고 외대 영어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만족해 당신을 좌절하게 했다. 그러나 어쩌랴, 둘째도 당신을 닮아 외국어 재능으로 한국 최초의 전문 통역사가 될 운명이었으니당신이 방심 중에 경북 중에 떨어진 셋째 아들은 대구고를 나와 역시 사립인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 후 미국 굴지의 기업 3M에 입시했고, 35년 후 미네소타 주 미니아폴리스 소재 본사 본부장으로 은퇴한다. 그의 가족은 모두 미국 시민이다. 부럽다.  

여기서 여러사람이 궁금해하는 의문이 생긴다. 자식 3남1녀가 모두 서울의 사립대학을 나왔는데 그 15년 동안 아버지는 자식들의 서울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했냐는 거다. 한 놈도 고학을 하지 않았으니 고스란히 당신이 감당했다. 그보다 앞서 아버지가 서울유학을 시키고 장가를 보내 현대건설의 신화 중 한사람이 된 억만장자 세째 삼촌도 우리들에게 토로했다. "서울에서 제일 좋은 직장을 다닌 나도 1녀2남 대학보내기가 힘들었는데 니들 아버지는 지방에서 아이 넷을 서울로 대학을 보냈으니 기적같은 일이다. 너희가 그런 아버지한테 잘못하면 내가 너희를 칠 것이다".

아버지는 이에 대해 자식들과 주위의 인정과 감사를 받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확인하고 싶은 것같았다. 못배워 큰 일을 하지못한 자신의 인생을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아버지가 네자식 학비를 댄 것이 기적같아 삼촌이 좀 도와주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두 분 다 부인하셨다. 그는 그 도중에 고향에서 대학을 나온 바로 밑 동생의 아들 등록금도 댔단다. 가히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4.         역전의 드라마는 미운 장남의 세 아들에서 연출된다. 그들도 모두 조부의 소원이었던 국립 서울대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사립인 연세대 정외과와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각각 67, 45기로 외무교시와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삼촌인 나도 기뻐 울었다. 대신 부친의 한을 풀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블로.  막내 손자는 역시 고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나도 아직 그들이 자랑스럽다. 

 

5.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공부를 못한 만큼 더 자식과 손주들을 공부시켰기 때문인가 당신은 주위에서 당신을 더 인정해주기를 원했나 보다. “내가 차지할 몫이 있다는 생각이 특히 장남과의 사이에 분란을 일으켰고 그 갈등 관계가 임종 때까지 이어졌을까?.

 

6.         한참 화가 날 때는 한 놈도 인간될 놈 없다고 하던 그의 말이 틀렸음은 그의 별세 후에야 극적으로 증명되었다. 그의 장례를 자식과 손주들이, 딸과 며느리들이 한국 최고의 우애 분위기 속에서 치러낸 것이다. 자손 자신들도 그런 분위기에 놀랐다. 미국에서 온 막내아들은 자신의 형제들이 자랑스럽다고 카톡을 날렸고, 그걸 본 나는 또 속으로 울었다. 자식들을 야단 친 당신의 속셈이 그것이었을까? 사후의 자식들 화합을 위해 그는 첨부터 소쩍새처럼 그렇게 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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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우애 깊은 집안을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당신은 그렇게 분노했나 보다.

 

죽고 나서 말썽 없는 진정 양반집을 만들기 위해

 

천둥처럼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셨나 보다.

 

안타깝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길고 긴 전투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백성 앞에 선

 

홍의 장군같이 생긴 당신이여

 

우애 깊은 자식들의 가정을 만들려고

 

2019년 그믐날엔 무서리가 그리 내리고

 

자식들에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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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동기들과의 모임에서 "모친이 15년 전에 돌아가셨다면 아버님이 많이 외로우셨겠다"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그의 분노는 외로움이었을까? 


이제 저승에서 어머님과 만나 부디 화를 푸시고 다시 해로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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