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은퇴 후 새로 얻은 연구실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오후 9시쯤부터 내 맘대로 보는 유튜브와 넷플릭스 채널이다. 특히 광고가 없는 프리미움 채널로 바꾼 유튜브는 정말 끝이 없는 보물섬이다. 그 중 지난 몇 달 동안 다시 본 90년대 초 SBS의 드라마 모래시계는 압권이었다. 밀레니얼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모래시계는 내 나이또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유튜브의 AI가 장난을 치는 지 1회부터 24회까지 계속 볼 수는 없고, 며칠이 지나야 다음 회를 볼 수 있었다. 인공지능이 장난을 치는 것이다. 다 보는데 석달이나 걸린 것 같다.

주인공 박태수(최민수 분)의 극중 생일은 1957년 5월 17일. 나보다 4살 적다. 그가 교수형으로 형장의 이슬이 된 1987년은 6/29 선언이 있었던 해로 나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에서 30대 중반의 청춘을 불사르고 있었다, 조직위원장으로 모시며 통역했던 노태우 당시 민정당 최고위원은 공평동의 당사에서 헨리 키신저 등의 외빈이 오면 날 불러 통역을 시켰다. 서울 시내에서 민주화 시위로 최루탄이 터지던 당시를 배경으로 한 모래시계가 방영된 것이 1995년 상반기, 6공의 청와대 비서관 역할을 마치고 YTN에서 국제부장으로 뛰던 나를 울렸고 60대 중반이 된 지금에 다시 나를 울린다.

그렇게 예뻐 보였던 윤혜린(고현정)은 어려 보이기만 한 반면 최민수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최민수는 머리가 길고 크지만 큰 키와 잘 빠진 몸, 그리고 표정연기가 주위를 압도했다. 또 이정재/박근형/남성훈/조경환/김보성 등의 조연들의 연기가 징그러울 정도로 뛰어나 드라마를 끌어가고 있었다. 특히 여기자로 나오는 이승연은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박상원의 부인 조민수도 역시 명연기였다.

마지막으로 잊을 수 없는 건 드라마의 배경음악이다. 러시아 민요 백학과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협주곡이라는 혜린의 테마도 좋지만 갈등관계가 벌어질 때마다 깔리는 피아도의 애절한 멜로디가 또 나를 울렸다. 영화 닥터 지바고 모리스 자르의 배경 음악에 결코 뒤지지않는다고 본다.

나보다 두 살 많던 천재 PD 김종학이 2013년 62세의 나이로 불행하게 죽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명복을 빈다. 지금까지 50번 정도 본 모래시계를 몇 년 후에 다시 보리라 예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