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비서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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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6-10 11:55 조회146,806회 댓글1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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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비서실의 추억
필자가 1990년 공보비서관으로 발령받아 청와대 근무를 시작했을 때 6공 초대 공보수석은 이수정씨(1940-2000).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 4/19 시국선언문을 작성한 문필가였다. 그는 당시 공보비서관들이 담당별로 대통령 연설문 초안을 써 올리면 수정하며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그는 부하의 연설 초안을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라는 첫 문장과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장만 빼고 다 고친다"고 악명이 높았다. 당시 공보수석의 주임무가 연설문 작성이었던 것은 대통령이 그만큼 역사에 남을 자신의 연설문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오후 6시 업무시간이 끝나면 당뇨 지병을 앓던 그는 사무실 냉장고에서 인슐린 주사를 직접 팔뚝에 주입한 후 초안 작성 비서관을 불러 그를 데리고 청와대 인근 청진동 등에서 저녁을 같이 하고 사무실로 복귀한다. 모든 전화를 사양하고 연설문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 밤 12시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였다. 새벽까지 쓰다가 1차 마무리가 되면 해장국을 먹으러 다시 청진동으로 나오곤 했다. 컴퓨터는 커녕 워드프로세서도 아니고, 메모리 기능도 없는 타자기 시절 여직원이 타자를 치기 위해 밤새 대기했다.
이 수석이 쓰던 필기 도구는 다양했는데 특히 애용했던 몽블랑 만년필은 크기가 다른 것들이 여러 자루 필통에 꽂혀 있었다. 하도 힘주어 글씨를 썼기 때문에 펜촉이 닳다 못해 오른 쪽으로 굽어 있었다. 그는 팬을 굴리기 힘들었던지 새로 나온 얇은 사인펜을 사용하는 날이 많아졌다. 비서관이 써온 원고를 함께 읽으며 수정한 초안과 지우다 살아남은 구절을 가위로 오려 군데군데 스테이플러로 찍은 넝마같은 연설 원고가 타자수에 건너간다. 통역을 하다가 청와대에 늦게 합류한 필자야 자주 불려가지 않았지만 지원군으로 참여할 때면 이 수석이 줄담배를 피우며 "내 목은 굴뚝"이라 푸념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역시 만년필을 좋아하고 특히 한자 필체도 괜찮았던 필자는 만년필을 모으는 취미를 길러 선물을 받기도 하고 해외에서 남은 출장비로 만년필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개국한 YTN에 합류하면서 국내 최초로 도입된 컴퓨터 뉴스 시스템을 쓰게 되자 만년필과 차츰 멀어져 필체도 나빠졌고, 모았던 만년필들도 구석진 서랍으로 밀려난 것이 안타깝다. 함께 샀던 외국산 잉크도 말라붙거나 색갈이 옅어져 버렸다.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 기념 유엔총회 초청 연설문에서 "대포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날"이라는 문구를 두고 이 수석이 수십 번이나 고쳐 쓰던 기억도 있다. 메모리 기능도 없는 타자를 치던 여직원이 새벽에 실수로 밤새 친 내용이 다 날아가버린 것을 발견하고 마구 울던 기억도 난다. 어쨌든 대통령은 연설 내용에 큰 신경을 썼고 이수정 수석을 신뢰했다. 그를 승계한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김학준 수석은 그런 고생은 사서 하지 않고 적정 수준에서 연설문을 써냈다.
이수정 수석은 1940년생으로 나보다 13살 선배지만 향년 60세로 너무 일찍 별세했다. 지병인 당뇨 때문이 아니라 잠시 입원한 병원에서 폐렴에 감염되어 돌아가셨다 한다. MBC 전무로 있다가 박철언 정책보좌관 소개로 공보수석으로 발탁되어 약 3년을 연설문 작성에 매몰되어 있다가 제2대 문화부 장관으로 1991년 12월부터 93년 2월까지 2년 여 재직했다. 그의 전임, 초대 문화부 장관이 이어령이었다. 돈을 몰랐던 이수석은 청와대를 나온 후 전임 전두환대통령과 달리 3년이나 부렸던 후배를 챙겨주지 않아 쓸 돈이 없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연설문을 난도질 당했던” 비서관들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이 수석은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차가운 지식인이었다. 모르는 게 없는 사람으로 주위에서 허튼 소리를 하면 즉시 잘못을 지적했고, 부하 비서관의 어설픈 연설문 초안을 가차없이 '수정'했다. 그런 성격이 자신에게는 독이 되어 건강을 해쳤는 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글이나 책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연설을 쓸 때, 그처럼 비서관들을 열등감으로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가 나은지,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타협하는 게 나은지는 알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의 공보수석이었던 최재욱은 이수정과 동갑으로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명 문장가였지만 연설문을 쓸 때 이수석만큼 까다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완벽한 문장은 없다”는 주의였을까? 그래서인지 1983년 아웅산에서 머리위로 폭탄을 맞았지만 아직 생존해 있다. 80세다. 이수석의 명복과 최수석의 장수를 빈다.
2003년 청와대를 접수한 상도동 세력은 나와는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동아일보 출신의 이경재 초대공보수석은 민주투사의 언어를 구사했고 연설문도 그렇게 썼지만 이수석만큼 문장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YS도 선이 굵은 연설을 원했지 문장을 일일이 따지지는 않는 듯했다.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는 '나는 걸음마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다"는 문장을 꼭 넣으라는 식이었다. 내가 다른 언어를 쓰는 청와대를 떠나게 된 후에는 대통령 연설에 대한 나의 관심도 멀어졌다가 통역대학원에서 연설 통역을 강의하면서 다시 높아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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