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정상들과의 능숙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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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9-04-06 15:49 조회1,3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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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동화출판사 발행
노태우를 말한다---국내외 인사 175인의 기록]에서
외국
정상들과의
능숙한 대화
곽중철 (대통령공보비서관)
필자가 노태우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하반기였다. 나는 당시 새파란 24세의 육군 중위로 청와대 경호실 정보처의 영어번역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국방부의 청와대 요원으로 근무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는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으로 나가는 당시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의 후임으로 그분이 청와대에 온 것이다. 그 후 약 1년 동안 같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고등학교 21년 선배라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자주 뵙지는 못했다. 1978년 6월 내가 군복무를 마치면서 청와대를 떠날 때에는 후일 청와대에서 그분을 다시 뵙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약 5년 후 그분과의 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3년의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3년에 귀국한 내가 1984년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수석통역으로 스카우트되어, 위원장으로 있던 그분의 통역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 5년 전 처음 뵌 적이 있다”라는 인사를 드린 후 위원장님을 위해 처음 불어로 통역한 사람은 튀니지 IOC 위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약 30분의 면담을 통역하고 나자 위원장께서 비서관을 통해 내린 나에 대한 평가가 “잘하는데 약간 덤비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한국 제1기 통역사 중 하나로 해외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와 피가 끓던, 아들 같은 후배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으리라.
그때부터 그분의 귀와 입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통역을 담당했다. 1984년 올림픽이 열렸던 LA에서도 모시고 나가 2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역하는 등 수많은 출장 길에서 외국인들과 만나는 그분의 분신이 되었다. 그분은 외국에 나가면 수행한 비서관과 나에게 “외화를 아껴 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 공식 일정이 끝나면 서울의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그분의 상대역인 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도 아주 친숙한 관계가 되었고, 사마란치는 노 대통령 다음으로 내가 많이 통역을 한 분이 되었다. 그래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입을 열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할 지 알 정도였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역을 시작하면 “You are used to my English” 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다 1986년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나간 노태우 씨가 당으로 찾아오는 외국 인사들의 통역을 위해 한 달에 몇 번씩 관훈동 당사로 나를 불렀다.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올림픽 통역안내과장으로 일하면서 가끔씩 그분을 수행해 출장 통역하던 중 1987년 6.29선언을 한 바로 다음 날 그분이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회관에 들러 조직위 직원들을 격려한 후, 방한 중이던 고 시페르코 IOC 부위원장과 접견할 때 오랜만에 통역을 하면서 나는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3년이나 통역한 분이 우리나라의 민주화선언을 하다니, 내 어깨가 쭉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대통령이 되신 그분은 “곽 군은 일단 올림픽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라!”라고 하셨고, 나는 1988년 9월 17일 메인스타디움에서 노 대통령께서 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선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다시 청와대로 출장 통역을 나갔다. 특히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는 국빈 만찬의 통역은 모두 내 차지였다. 혼자서 이른 저녁을 먼저 챙겨 먹고 검정 나비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대통령의 뒤에 앉아 통역을 끝내고 나면 어떤 때에는 “수고했어! 배고프지?”라고 격려와 배려를 하시기도 했다. 또 해외순방 때에는 대통령 특별기를 함께 타고 나가 통역을 했는데 총 16번의 해외출장 중 14번을 따라 나갔다. 요사이도, 당시 해외순방 수행원들을 위해 인쇄한 소책자들을 보며 추억에 젖곤 한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후 나는 비서실 공보비서관으로 발령 받아 다시 한울타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기 시작했다. 공보비서관으로 대통령이 할 말씀들을 작성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그분을 통역했고, 그 시절이 내 젊은 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보였다고 지금 나의 가족은 증언한다.
1992년 9월 22일, 노 대통령은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의 연단에서 제47차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고, 필자는 2층의 컴컴한 통역실에서 연설문에 맞춰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약 20분의 연설 후에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차례였는데 대통령께서 갑자기 연설을 중단했다. 연단을 내려다보니 대통령께서 뭔가를 찾고 계셨다. 바로 앞 페이지에 붙어 넘어간 마지막 페이지를 놓친 것이다. 약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결론을 말했다. 필자가 들고 있는 번역본보다 짧은 말이었다. 필자는 번역본의 내용을 반으로 줄여 빠른 속도로 통역한 후 “경청해주셔서 감사하다”라며 통역을 마쳤고, 참석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연단을 내려온 대통령은 통역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의전수석비서관은 “곽 비서관이 잘 처리했다”라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이 한 16번의 해외순방 중 내가 수행하지 않은 것은 취임 초기의 첫 일본 방문과 고르바초프를 만난 1990년 샌프란시스코 극비 방문뿐이었다. 노 대통령의 주된 업적이 이 나라 민주화의 아침을 열고 북방외교로 한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드높인 것이라면, 나는 그분의 외교활동에 조그만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노 대통령은 만나는 외국 고위인사들에게 신중하고 세련되고 점잖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사전에 준비된 말씀자료를 바탕으로 자료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노련한 배우처럼 대화를 풀어가는 그분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도 그랬고, 영국 여왕이나 필립 공을 만날 때도 그랬으며 중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도 그랬다. 가끔씩 막 통역을 시작하려는 내 팔을 붙들고 자신의 발언내용을 확인하며 신중한 통역을 당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통역을 끝내고 힘에 부칠 때 그분이 던지는 “오늘 곽 군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노 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친 후에도 나는 그분을 계속 통역했다. 연희동 집으로 찾아오는 해외인사들을 통역하러 가면 집 앞에서 경찰이 신원조사를 했는데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찾은 사마란치 위원장을 만나러 그가 투숙한 호텔방으로 갔을 때는 대통령 재임 시와는 달리 조금 늦게 나타나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는 사마란치를 보고 짓던 그분의 씁쓸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그분을 ‘물태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분이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물처럼 좋은 게 어디에 있는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지 않고 주위의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며 적응했기에 이 나라의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또 북방정책으로 불리는 노 대통령의 외교적인 업적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하며 그분의 평안한 여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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