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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에게로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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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9-04-06 15:52 조회1,4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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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9월 고려서적 발간 [서울 올림픽의 묻혀진 이야기]

 

                            다시 그에게로 달려가리라

 

郭 重 哲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통역안내과장

연합TV뉴스 국제부 월드뉴스팀장

 

1985년 어느 날 저녁 서울 시내 한 일류호텔의 올림픽 관련 리셉션장.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방한 중이었고 나는 당시 노태우 조직위원장을 따라 수행 통역을 하고 있었다. 사마란치 위원장과 함께 행사장을 돌며 초청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던 도중 당시 박세직 체육부장관이 나타나자 노 위원장은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 사람이 신임 체육부장관으로서 앞으로 서울올림픽을 위해 큰 일을 할 사람입니다.”

언제나처럼 깊은 뜻을 헤아릴 틈도 없이 통역에 바빴던 나는 이 말을 곧 잊었지만 사마란치는 그렇지 않았다. 1986년 초 박세직 장관이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게 된 후 다시 만나게 된 사마란치는 작년의 리셉션장에서 노 위원장의 소개를 받은 이후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 일하는 날이 올 줄 알았다.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남자의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

박 위원장과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의 비서실 요원도 아니었고 그가 노 위원장처럼 자주 나의 통역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30대 초반의 5년 동안 청춘을 살라버린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개 과장급 직원으로서는 그를 모시며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자부한다.

이제 그의 진갑을 맞아 나오는 기념문집에 많은 기고가들은 그의 장점을 열거하며 듣기 좋은 얘기를 많이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얘기도 섞어서 구색을 맞추고 싶다.

우선 그는 잠시라도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로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서실 직원들마저도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보다 더 바쁜 사람이었다.

19864,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ANOC) 총회가 서울에서 열리기 직전 박 장관은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겸임 발령을 받아 우리 앞에 나타났고 우리는 혼비백산했다. 당시 나는 핵심 총회 준비요원 중 한 사람으로 총회장인 시내 롯데호텔의 한 객실에 묵으면서 모든 사생활을 버리고 주야로 일하고 있었다.

회의 기간중인 26일 강남의 한 병원에서 나의 하나뿐인 무남독녀 외딸이 태어났는데 나는 국익을 앞세워, 바쁘다는 이유로 병원에 나타나지 않아 두고두고 집사람의 원망을 듣는 실책을 범했다. 어디 그뿐이랴, 탄생을 지켜보지도 않은 주제에 딸이니 이름을 행사 이름인 안옥(ANOC, 安玉)으로 하자고 심각하게 제의했다가 분노에 찬 퇴짜를 맞았다(다행히 딸 이름은 정민이가 되었다).

취임 직후 호텔을 찾은 박 위원장은 행사준비를 위한 기본계획을 요구했다. 그런 것은 준비된 것이 없다고 하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밤중에 비상회의가 열리고, 행사준비위원장이 교체되고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던 우리는 숨을 죽였다. 며칠 후 변두리 고깃집에서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들과 소주 한잔에 등심 첫 조각을 집어 드는 순간 언제부턴가 차고 다니던 허리춤의 삐삐가 울리는 첫 경험을 했다. “박 위원장이 또 회의를 소집했으니 즉시 호텔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원점에서 다시 준비를 시작한 그 대회가 대성공으로 끝나자 나는 장군 출신답게 전면전을 지휘하듯 하는 그의 리더십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 앞에 고생문이 훤한 것은 차치하고

앞에서 통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의 영어실력은 외국어가 전공인 나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군 시절에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미국에서도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창 발동(?)이 걸렸을 때는 내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신들린 듯 영어로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무서운 사람이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불가능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그는 영어를 좋아했다. 통역이 전공이 나도 자주 외국어가 싫어지고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귀찮아 자리를 피해 버리는데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계시는 분들이 외국어를 너무 많이 하면 나쁜 이미지를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다.

1987년인가 유고슬라비아와 터키에 출장을 가게 됐을 때 박 위원장은 그 나라 말을 몇 마디라도 배워야겠다고 해서 김종민 비서실장이 나에게 SOS를 보내왔다. 미국으로 일본으로 수소문해서 회화책을 공수해 오고 복사를 하고또 한 차례 법석을 떨었다.

나는 통역이 필요한 공식행사에서 영어나 불어로 그를 통역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전혀 예측불능이었다. 외국인들이 전문위원으로 있는 사무실에서 며칠을 두고 고치고 또 고쳐 완성된 연설문을 가지고 통역준비를 해서 나가면 전혀 다른 말씀을 하는 경우가 많아 늘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그가 행사장으로 오는 길에 연설문을 보다가 다른 생각이 났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연설은 예상보다 길어지기가 십상이었다.

연설 서두에 여자의 치마와 남자의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고 참석자들을 웃기며 안심시키고 나서 준비된 연설보다 몇 배나 긴 연설을 해서 통역하던 내가 배고픈 오찬•만찬 참석자들 보기가 민망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앞으로 말씀을 약간이라도 줄여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단상 위에 우뚝선 그의 모습

연설뿐 아니라 그의 일정도 예측불능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최고의 일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정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경기준비도 바쁜데 조각공원을 만든다고 스위스 출장 도중 유럽의 조각가들을 만나는 일정을 짰다. 내가 호텔방의 전화로 그 까다로운 예술가들과 면담 약속을 다 받아 놓았는데 자꾸만 바꾸라는 지시가 함께 수행했던 비서실장을 통해 떨어졌다.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의 대외일정이 이렇게 널 뛰듯 해서는 곤란하다는 직언을 했다가 주위의 조직위 간부들의 공감 어린 경고(?)를 받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아주 건강하고 정력적이다. 출근시 집무실이 있는 건물의 14층까지 뛰어 올라가는데 당신은 맨몸이지만 가방이나 서류를 들고 쫓아가는 수행비서는 죽을 맛이다. 그 비서뿐 아니라 비서실의 여직원들까지 기진맥진하여 노랗게 뜬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지금 국회의원 회관에 있는 비서진들의 안색은 어떠할까 궁금해진다. 제발 부하들의 체력을 계산해 주시기 바란다.

다른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그렇듯이 박 위원장도 식욕이 좋으시다. 그 많은 오찬과 만찬에 나왔던 스테이크를 한번도 남기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스위스 출장시의 일인데 조직위에 근무했던 제네바 대표부의 한 직원이 즉석라면과 아내의 정성이 담긴 김치를 싸가지고 왔다. 수행한 비서는 우리 위원장님은 라면 따위는 안 드신다고 했지만 나는 라면 한 그릇과 김치 한 사발을 호텔방으로 넣어 드렸다. 나중에 밖으로 나온 쟁반을 보니 김치와 함께 라면국물까지 깨끗이 비워 있었다. ‘전세계를 누비는 그도 얼큰한 라면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나는 감격하여 그 기쁜 소식을 대표부 직원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성질이 급하다. 모 수행비서의 귀띔으로는 부부동반 행사가 있어 댁에서 사모님의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행사장으로 떠나 버리기 때문에 사모님은 택시를 잡아타고 따라가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위원장보다 더 텁텁한 성격의 그 사모님은 위원장의 급한 성질을 중화시키면서 우리에게 인기가 좋았다.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미남이다. 선이 굵은 수려한 얼굴에다 훤칠한 키, 당당한 체격무슨 옷을 입어도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의 조직위원장으로서 세계 무대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올림픽 개막식조직위원장 인사를 위해 사마란치와 함께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단상에 우뚝 선 잘생긴 그가 우리는 자랑스러웠다. 뿐만 아니다.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화려한 언변거기에다 그는 명필이다. 붓펜으로 휘갈긴 그의 서명은 내 눈에는 분명 예술이다. 그보다 신언서판이라는 옛말에 더 들어맞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2주일을 위한 6년 동안의 헌신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의 내용은 6개 국어로 동시통역되어 관중들은 당일 지급된 초소형 무선라디오로 이를 들었는데 나는 동시통역의 전문가 입장에서 처음에 이 계획에 반대했다. 그런 계획도 가장 충실하고 완벽한 대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박 위원장의 끔찍할 정도의 정성으로 기획된 일 중의 하나였다.

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무선마이크를 돌려가며 진행된 한창 유행했던 회의에서 나는 입안자였던 이어령 교수에게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어폰을 끼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불편한 동작이고 눈앞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생일대의 장관에 환호를 보내는데 세세한 설명이 무슨 소용이며 누가 똑똑하지도 않은 그 소리를 듣겠는가? 좋은 행사 분위기를 깰 뿐이다라고 다시 한 번 직언을 했다. 천하의 아이디어맨인 이 교수는 분노 어린 반론을 폈고 박 위원장은 급히 논쟁의 비화를 막았다.

결국 이 계획은 강행되었고 개막식이 며칠 남지 않은 시기에 나는 다시 그 긴 개폐회식의 시나리오를 그것도 6개 국어로 밤새 번역시키고 통역사를 구하고나로서는 마지막 깔딱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위의 예를 보더라도 앞으로 서울올림픽대회만큼 완벽하고 지나칠 정도의 준비를 하는 올림픽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사마란치도 서울대회는 사상 최고의 대회였고 앞으로 이 기록을 깰 대회는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극성스러운 박 위원장이 나서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폐막식이 끝나고 언어서비스팀이 배치되었던 프레스센터(강남 무역센터 전시장 앞의 가건물)의 텅빈 사무실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나는 멍하니 자문했다. ‘이 모든 결과의 의미는 무엇인가? 2주일 만에 정신없이 끝나버릴 이 행사를 위해 6년 동안 그 많은 일을 했던가? 우리 평생에 다시 없을 올림픽에 대한 이 경험과 전문지식을 앞으로 어디에 쓸 것인가?’

허무한 마음이 꼬리를 물었다.

대회 이후 닥쳐온 국내정치의 소용돌이는 우리를 더욱 허무하게 하고 올림픽의 의미를 무색하게 했지만 30대 초반의 청춘을 바친 행사에 후회 없을 만큼 전력투구했다는 자부심은 아직 내 마음 한구석에 떳떳이 남아있다. 기적이 일어나서 우리 생전에 서울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게 되고 박 위원장이 또 한 번 해 보자고 나를 부르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그에게로 달려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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