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대학원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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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6-26 12:45 조회1,9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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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대학원을 떠나며
곽중철 (郭重哲):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교수
나는 79년 9월 아시아 처음으로 개원한 외대 통역대학원의 1기로 입학했는데 40년 만에 본격 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 통역 대학원의 최고참 교수로 이 달에 정년을 맞는다. 1980년 유학시험에 합격해 정부장학생으로 파리통역대학원ESIT 로 가 3년 수학 후 한영불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을 취득했다. 내가 귀국한 1983년, 아웅산 폭파와 칼기 피격 등 초유의 사건이 터지자 공중파 TV방송들이 처음으로 위성중계를 했고, 그 때 이 땅에 처음 TV 동시통역을 선보인 사람이 되었다.
최근 미북 정상회담을 통역한 언론에서 각광을 받은 미 국무부의 중년여성 통역사도 나의 후배이다. 그녀의 실력을 묻는다면 나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할 것이다. “타고났다. 정상회담이란 것이 아주 어려운 통역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콘택트(고객과의 눈 맞춤)가 완벽하다. 트럼프 뿐 아니라 김정은과도 눈으로 말한다. 10수년의 관록이 그걸 가능케 한 것이다. 사랑 뿐 아니라 통역도 눈으로 하는 것이다.”
유학 후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의 수석통역사로 발탁돼 위원장의 영/불어 통역을 담당하다가 신설된 통역안내과의 과장을 맡았다. 올림픽 성공 후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고, 한국 최초로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대통령이 된 노태우의 통역을 계속 담당하다가 90년부터 93년까지 청와대 공보비서관과 춘추관장을 역임한 공로로 홍조근정훈장도 받았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의 비서실에서 밀려난 후 잠시 방황하다가 1994년 3월 YTN 창설요원으로 1999년 2월까지 국제부장으로 위성통역실 등을 운영하면서 모든 위성중계 동시통역도 총괄했다. IMF의 여파 속에서 모교의 부름으로 99년 3월 통역대학원 교수로 임용되고 2006년 13대 원장이 되었다. 그 동안 제자들과 함께 아셈회의, 월드컵, 세계감찰총장회의, 대구육상, 인천 아시안게임 등의 통역으로 국가대사의 성공에 일조했다.
나는 모교임용 직후부터 국제협력에 진력해 세계통번역학교CIUTI 의 아시아 최초 정회원교가 된 모교의 원장으로2006년 CIUTI 총회를 주최했다. 그 후 2007에는 한국통번역협회KATI 를 문화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창설했고 2012년부터 회장직을 4년 연임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가 있다면 기계통번역으로부터 인간 통번역을 지키는 일이다. 2017년 2월, 모 사립대학에서 인간 대 기계 번역 대회가 열린다고 했을 때 나는 심사위원장을 자처했다. 4개분야에서 한번도 번역되지 않은 텍스트를 골라 KATI 회원 번역사 4명을 배치해 시합을 시켰다. 물론 양쪽 모두에게 문제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그 결과 모두 인간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그는 심사평에서 “아직은 번역으로 밥 먹고 사는 전문 번역사들을 기계가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일갈했다.
체스나 바둑에서 AI가 완승하고 있어도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담겨있는 도구이상의 것이므로 당분간은, 아니 영원히 AI는 인간번역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차까지의 산업혁명에서도 그랬듯이 4차혁명의 AI 시대에도 기계와 인간은 대결구도가 아닌 상승의 구도를 엮어갈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므로 AI를 이용해 더 많고 더 완벽한 번역을 가능하게 할 것인 바 해외 전문가들도 상황을 보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AI 마케팅담당자들만 곧 AI 통번역의 시대가 도래해 인간은 번역을 할 필요도, 심지어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도 없게 된다는 과대 홍보를 펼치고 있다. 미국을 욕하면서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인사들처럼 그들도 자기 자식들에겐 계속 영어공부를 시킬 것이다. 통번역의 역사가 가장 긴 서구에 가봐도 우리처럼 냄비 끓듯이 하진 않는다. 다만 “아침에 음성인식으로 삽입하는 CNN 뉴스의 자막을 봐도 그렇게 오류가 많다. 하물며 인식한 음성을 번역한 후 다른 음성으로 통역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그 시간 동안 인공지능을 이용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한 통번역을 제공하는 길을 주도해 찾을 것”이라고 느긋하게 얘기한다. 그래서 이 나라의 인공지능 번역기업들에 나는 훈계한다. “호들갑 떨지 마세요. 한 방에 훅 갑니다!”
내년 7월 초 서울에서 국내외 정통파 번역학자들과 인공지능 전문가들과의 학술대회가 열린다. 내가 2015년 KATI를 국제번역가연맹FIT 의 정회원으로 등록시켰고, 2017년에는 FIT 이사회 이사가 되어 2019년 7월 제9회 아태통번역포럼을 서울에 유치한 후 현재 동 행사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에 진력하고 있다. 2019년은 외대 통역대학원 창립 40주년이 되는 해라 나는 오는 8월 말 정년 후에도 모교에 남아 행사의 성공적 마감을 진두 지휘할 예정이다. 이 포럼에는 중국번역사협회장을 비롯한 300여명의 중국 번역학자들과 FIT회장을 비롯한 세계 번역계의 거물들이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 측에서는 이어령 박사가 기조연설을 하고 반기문 전 유엔총장에게 개막 축사를 의뢰해 놓았다.
나의 은퇴를 앞두고 많은 후배들과 제자들은 말한다. “그가 없는 통대는 상상할 수 없다. 그는 통대의 전설이요 신화다. 수많은 후배들과 제자들을 사랑으로 이끌며 올바른 통역을 가르치고 통역 일을 주선하고 취업을 시켰다. 인공지능의 과대선전 속에서 국제협력으로 양측의 포럼까지 유치했는데 이제 그 많은 일을 누가 하나?” 아무 문제 없다. 내가 아니라도 학교와 통역계를 이끌어갈 후배와 제자들이 많기에 나는 마음이 아주 편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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