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통역학교 ETI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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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8-08-09 17:05 조회1,57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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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통역학교 ETI의 추억 04-03-05
케리 미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부인이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과 스위스 제네바의 통역대학원 동기생이고, 유엔 통역사로 일하던 1966년, 미래에 미국 상원 의원이 될 세계적 토마토 케첩 회사 집안의 외아들 존 하인즈와 결혼하면서 미국인이 됐다는 기사를 보고 스위스 통역학교 ETI 가 새삼 기억에 떠오릅니다.
우리 통대 출신으로 ETI에서 수학한 사람은 둘이 있는데 현재 BK 사업단의 수주담당 상임연구원으로 있는 최용웅 씨와 외대 불어과에 재직 중인 윤석만 교수입니다.
최용웅 연구원은 통대 한불영과 1기(나는 한영불과)로 입학해 80년 9월 국비 장학금을 받아 제네바 통역학교 (ETI)로 갔습니다. 그 때 같이 갔던 후배가 외대 불어과의 윤석만 교수. 파리 통역대학원에는 저와 세 여학생이 함께 갔습니다.
최 형과 저는 기혼이라 부부 동반이었지요.
도시와 학교는 다르지만 3개언어 통역이라는 Mission Impossible의 어려움은 같았을 겁니다.
낯설고 물선 유학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던 81년 12월 말 성탄 휴가를 맞은 우리 부부는 제네바로 동료 유학생들을 찾아 갔습니다. 생긴지 얼마 되지않은 TGV를 타고 갔읍니다.
제네바 호수(일명 레만 호)의 공기는 속이 시릴 만큼 시원했지만 윤 후배는 모터 자전거 타고 가다 넘어져 다리를 크게 다쳐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최형은 우리를 같은 제네바 대학 기숙사에 투숙시켰는데, 그 기숙사도 파리 대학촌(Cite Universitaire)의 기숙사보다 훨씬 깨끗했고, 통역대학원이 있는 하얀 눈 속의 제네바 대학도 파리 대학들의 캠퍼스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습니다. 최형은 우리 부부를 중고 벤츠 자동차에 싣고 눈 쌓인 알프스의 몽블랑 등을 구경시켜주었습니다.
한달 500 미불이라는 장학금이 부부 생활에는 모자라 최형은 제네바 유일의 한국 식당 <아리랑>에서 서비스 아르바이트(demi-debarasseur)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탄 이브에 최형 부부는 우리 부부와 윤 후배를 아리랑 식당에 초대했습니다. 식당은 성탄 휴가에 휴업 중이었고 한국인 주방장이 가난한 유학생들을 위해 냉장고를 열어 젖히고 한껏 솜씨를 발휘했습니다.
1년 반 만에 눈으로 덮인 레만 호수를 배경으로 만난 통대 1기생들은 오랫만에 먹는 고급 한식과 좋은 술에 취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지요.
거나하게 술이 오르자 우리는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물론 기타 반주나 노래방 기계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기껏해야 젓가락 반주에 생 노래였지요. 신세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생목소리로 애창곡의 가사를 2절까지 모두 외워 부르는 당시 우리들의 노래는 현재 화면에 뜨는 가사를 보면서 쉽게 부르는 노래방 노래보다 훨씬 힘들었던 만큼이나 더 낭만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날 밤 최형은 그의 영원한 18번 애창곡 <눈이 내리네: Tombe la Neige>를 열창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종종 들었지만 그날 밤 제네바에서의 그 불어 노래는 우리 모두를 유학의 시름이 아닌 낭만에 젖게 했습니다. 최형의 목소리는 그 노래가 아다모가 아니라 최형을 위해 작곡됐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불어를 아는 친구들이 부르는 <눈이 내리네>를 수많이 들었지만 최형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다음 가수는 윤석만 (교수). 타향에서 다리를 크게 다쳐 우울했던 참이었지만 선배의 열창에 화답하려 목발도 없이 일어섰습니다. 그가 부를 노래는 에디트 삐아프의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다 부르면 5분이나 걸리는 이 노래를 윤 후배는 몸 아픈 타향살이의 향수를 실어 15도 상방을 응시하며 애절하게 불러 제껴 우리 모두의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두 사람은 불어 전공이라 불어노래를 불렀지만 영어가 전공인 저는 우리말로 뽕짝을 불렀습니다. 나훈아와 배호의 메들리... 참석자들의 마음은 모두 한국의 고향 하늘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제네바의 세 사람은 파리로 답방을 하기도 했지만 귀국 후 20여년간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느라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그런 노래를 나눌 기회는 더욱 없었습니다.
하얀 눈이 내린 오늘, 문득 20여년 전의 그 밤이 생각나면서 그 동안 그런 주위 사람들에게 더 잘 대해주지 못했던 점이 사무치게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만약 케리가 당선되면 나는 미국 대통령 부인의 <제네바 통역대학원> 동문을 두 사람이나 갖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곽중철 (끝)
# 첨부 파일에는 제 인생의 전기들이 눈물없이는 못볼만큼 더 많이 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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