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체육회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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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7-06-27 15:16 조회3,47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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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체육회담의 추억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중철 010-5214-1314
오는 6월 30일까지 열리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참석 차 김포에 도착한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은 2018 년 평창 겨울올림픽 남북 분산개최와 일부 종목의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해 “(남북의)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약속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IOC가 개입해야 한다. 바흐 IOC 위원장이 오면 논의될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또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태권도대회 개막식에서 남북 단일팀을 제안하자 2시간 만에 “올림픽까지 시간이 촉박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필자는 88 서울 하계 올림픽대회를 앞두고 일부 종목의 북한 분산개최를 위한 IOC 주관의 4차례 남북체육회담을 모두 동시통역한 경험에 비추어 장웅 위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이틀씩 4차례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느에서 IOC 주재로 열린 남북체육회담은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탁구와 양궁의 일부 경기를 북한에 준다는 명분으로 네 차례나 회담을 했지만 남북한과 IOC 모두 그 것이 성사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우리와 IOC는 LA 올림픽에 이어 북한이 또 올림픽을 보이콧할까 봐 ‘북한 달래기’로 대회 개회까지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었고, 북한은 남한의 대회에 작은 숟가락만 올려놓는 자존심 깎는 행동을 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체면상 회담에 참석했다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대회 보름 전인 1988년 9월 2일 불참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로잔느의 회담은 참으로 독특했다. 한가지 말을 쓰는 남북한의 회담인데 IOC가 주재했기에 영어로 진행되었고, 남북한 대표들의 우리 말 발언은 각각 영어로 통역되어 IOC 측에 전달되었다. 뿐만 아니라 IOC측의 영어발언도 남북 통역부스에서 각각 한국어로 통역되어 각 대표단의 귀로 전달되었다. 필자(당시 조직위 통역안내과장)는 후배 통역사 1명과 함께 한국 대표단이 앉은 좌측 뒤의 부스에 앉았고, 옆 창문으로 보이는 오른쪽 부스에는 북한 측 통역사 2명이 앉아 통역했다. 회담이 끝나면 통역사들은 어색하게 인사하고 가져온 담배를 서로 나누기도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사마란치 위원장이 묶고 있던 로잔느 팰리스 호텔의 각각 다른 층에 숙소를 잡은 약 20명씩의 남북 대표단은 매일 아침 호텔 1층에서 조식을 하며 만났지만 회담은 1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각각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로잔느에 도착하기 전 이미 각 측 본부의 지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회담이 시작되면 금새 이견이 표출되었고, 논쟁이 조금이라도 과열되면 IOC 위원장이 정회를 선포하고 ‘각 측의 의견을 다시 조율해 내일 아침 다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통역을 시작한 후 후배에게 마이크를 넘길 시간도 안돼 회담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따로 호텔로 돌아온 두 대표단은 다시 각각 대책회의를 하고 본국 본부의 지시를 기다렸다가 이틀째 회의에 나갔다. 남는 시간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치즈를 즐기기도 했지만 4차까지 회담을 하다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틀간의 회담이 끝나면 본부에 제출할 회담 결과보고서를 밤 새워 만들곤 했다. 이런 모든 긴 과정을 함께 지켜본 장웅 위원이 “시간이 없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선수단은 동계올림픽의 단일팀이나 분산개최에 신경 쓰지 말고 경기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란다. 장 위원이 “지난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일팀을 구성할 때도 회담을 22차례나 진행하며 다섯 달이 걸렸고, 정치는 항상 스포츠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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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기고] 남북체육회담의 추억
입력 : 2017.06.30 15:48:51 수정 :2017.06.30 20: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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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막을 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참석차 김포에 도착한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은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 남북 분산 개최와 일부 종목의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해 "(남북의)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약속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IOC가 개입해야 한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오면 논의될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또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태권도대회 개막식에서 남북 단일팀을 제안하자 2시간 만에 "올림픽까지 시간이 촉박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필자는 88서울하계올림픽대회를 앞두고 일부 종목의 북한 분산 개최를 위한 IOC 주관의 네 차례 남북체육회담을 모두 동시통역한 경험에 비추어 장웅 위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이틀씩 네 차례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IOC 주재로 열린 남북체육회담은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탁구와 양궁의 일부 경기를 북한에 준다는 명분으로 네 차례나 회담을 했지만 남북한과 IOC 모두 그것이 성사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우리와 IOC는 LA올림픽에 이어 북한이 또 올림픽을 보이콧할까 봐 `북한 달래기`로 대회 개회까지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었고, 북한은 남한의 대회에 작은 숟가락만 올려놓는 자존심 깎는 행동을 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체면상 회담에 참석했다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대회 보름 전인 1988년 9월 2일 불참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로잔 회담은 참으로 독특했다. 한 가지 말을 쓰는 남북한의 회담인데 IOC가 주재했기에 영어로 진행되었고, 남북한 대표들의 우리말 발언은 각각 영어로 통역되어 IOC 측에 전달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IOC 측의 영어 발언도 남북 통역부스에서 각각 한국어로 통역되어 각 대표단의 귀로 전달되었다.
필자(당시 조직위 통역안내과장)는 후배 통역사 1명과 함께 한국 대표단이 앉은 좌측 뒤의 부스에 앉았고, 옆 창문으로 보이는 오른쪽 부스에는 북한 측 통역사 2명이 앉아 통역했다. 회담이 끝나면 통역사들은 어색하게 인사하고 가져온 담배를 서로 나누기도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묵고 있던 로잔 팰리스 호텔의 각각 다른 층에 숙소를 잡은 약 20명씩의 남북 대표단은 매일 아침 호텔 1층에서 조식을 하며 만났지만 회담은 1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각각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로잔에 도착하기 전 이미 각 측 본부의 지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회담이 시작되면 금세 이견이 표출되었고, 논쟁이 조금이라도 과열되면 IOC 위원장이 정회를 선포하고 "각 측의 의견을 다시 조율해 내일 아침 다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통역을 시작한 후 후배에게 마이크를 넘길 시간도 안 돼 회담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따로 호텔로 돌아온 두 대표단은 다시 각각 대책회의를 하고 본국 본부의 지시를 기다렸다가 이틀째 회의에 나갔다. 남는 시간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치즈를 즐기기도 했지만 4차까지 회담을 하다 보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틀간의 회담이 끝나면 본부에 제출할 회담 결과보고서를 밤새워 만들곤 했다.
이런 모든 긴 과정을 함께 지켜본 장웅 위원이 "시간이 없다"고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동계올림픽의 단일팀이나 분산 개최가 불확실한 만큼 우리 선수단은 경기 외적인 것보다 경기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장 위원이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일팀을 구성할 때도 회담을 22차례나 진행하며 다섯 달이 걸렸고, 정치는 항상 스포츠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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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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