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7선의원 김재순 전 국회의장 별세, 향년 93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5-18 17:53 조회1,629회 댓글0건

본문

내가 신당동에 있던 김재순 님의 댁에 드나들며 숙박까지 한 것은 1972년에서 1973년까지였다. 그의 장남이 외대 영어과의 클래스메이트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1971년 공화당 원내총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다녔지만 공직에 바쁜 그를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고, 친구를 통해 댁에 들어오신 것을 전해 듣고는 했다. 현대건설에 다니던 내 삼촌의 집이 지금은 도시개발로 없어진 신당동 언덕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집이 훨씬 넓고 좋은 2층 양옥이었다.

그 집에는 그의 모친, 즉 김재순 의장을 꼭 닮은 내 친구의 친할머니가 항상 계셨고, 예쁘장하셨던 어머니도 가끔씩 식당에 나타나셨다. 아들만 넷인 집에서 그 친구들을 다 신경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평양 식으로 김장을 담는 날이면 김장밥이라는 별식까지 얻어먹곤 했다. 김재순 님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고문으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지만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재산 축소 신고 등의 논란에 휘말려 '토사구팽'으로 의장과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1972년 그의 집에서 가난한 학교 옆 하숙생이었던 내가 처음 느낀 것은 "집에 비싼 외제 물건이 많고, 참 부자"라는 것이었다. 집 차고에 세워져 있었던 볼보 승용차는 지금과는 달리 정말 희귀한 외제 차였는데 덴마크에 사는 친척이 보내준 것이라 했고, 우리 대학 친구 2명과 함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에 있던 별장에 놀러가 요트도 타보고 탁구도 쳤던 기억이 새롭다. 그 집 4형제는 모두 키는 작았지만 개성이 뚜렷한 매력남들이었고, 위계질서가 뚜렷이 잡혀있었다. 자신들이 금수저임을 자각하고 흙수저 친구들을 도와주려 애쓴 인성들이었다.

평양출신으로 해방 후 모친을 모시고 빈 손으로 남하한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민주당 선전차장·국제문제연구소 총무로 정계에 입문한 후 재산을 모은 것을 누가 탓하랴? 그의 명복과 내 친구를 비롯한 4형제의 행복을 빌 뿐이다. 

고이 잠드소서...

 



 

 
 
 

곽중철 (2016-05-20 11:30:32) 
 
조선일보 [만물상] 한강, 샘터, 김재순
 김윤덕 논설위원·문화부 차장
 입력 : 2016.05.20 03:00

김수근이 설계한 대학로 샘터 사옥에 찻집 '밀다원'이 있었다.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맛이 좋았다. 통유리창 너머 대학로 사계(四季)를 민낯으로 즐길 수 있어 명소가 됐다. 단골도 많았다. 월간 샘터를 창간한 김재순 국회의장과 고건·서영훈·이세중 같은 명사가 아침마다 만나 담소했다. 그들이 떠나면 승효상·민현식 비롯한 건축가가 모여들었다. 한낮엔 문인과 연극인이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학 갓 졸업해 들어간 샘터에서 백발에 거친 이북 사투리 쓰던 김재순을 어린 기자들은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했다. 국회 갔다가도 반드시 샘터에 들르는 '의장님'이 계단 올라오는 소리만 들려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설가 최인호라도 오는 날이면 사옥에 시가 냄새가 진동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두 양반이 다리 꼬고 앉아 파이프 담배 마주 피우며 껄껄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인호 말고도 김재순은 문인들을 지독히 사랑했다. 19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할 때 김지하를 초대 편집장으로 영입하려다 폐병 3기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피천득과는 첫눈 오면 서로 전화를 걸어주며 40년 우정을 나눴다. 김승옥·강은교·문정희 같은 이들이 샘터를 사랑방 드나들 듯했고 염무웅·정채봉·김형영이 편집장을 지냈다.

▶한강(韓江)이 샘터 기자로 입사한 건 1993년쯤이다.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했던 그녀는 말수가 적어 동갑내기인데도 어려웠다. 한번은 인천 을왕리 바닷가로 기자들이 소풍을 갔다. 둘러앉아 김밥 먹고 노래 부르고 수다 떠는데 한강이 보이질 않았다. 둘러보니 혼자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얼마나 골똘히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해 겨울 한강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붉은 닻'이라는 소설로. 작품에 등장하는 바닷가가 그날 소풍 갔던 을왕리였다.

▶돌아보니 샘터 기자로 산 3년 8개월은 축복이었다. 정채봉은 "그 집 댓돌에 신발이 몇 켤레 있는지도 알아야 기자"라고 가르쳤다. 늘 부러웠던 동료 한강은 '작가란 풀 한 포기, 햇볕 한 줌도 예사로 보지 않는 사람'임을 일깨웠다. 사흘 전 맨 부커상 거머쥐고 활짝 웃는 한강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낮게 뜬 눈, 느릿한 말투만큼이나 선하고 고운 그의 심성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김재순 의장은 한강이 상 받은 날 오후 세상을 떴다. 수상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샘터 꼬마 기자가 나이 마흔 넘어 당신을 인터뷰하러 간 날 "(내 모습이) 아직 연애할 만허우?" 하며 파안대소하던 호랑이 할아버지가 그립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곽중철 (2016-05-22 08:44:16) 
 
김재순님은 1970년 교양지 '샘터'를 창간하는 등 출판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그는 글쓰기에도 일가견이 있어 피천득 선생,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최인호·정채봉 작가, 장영희 교수가 샘터란 작은 공간에서 우리 사회의 교양 기반을 크게 넓혔다. 특히 방송인 김성주의 누이 김윤덕이 샘터에서 필력을 길러 조선일보에서 보물같은 기자가 되었다.
김재순 당신도 샘터의 뒷 표지에 글을 썼는데 아직 기억에 남는 글은 다음이다:
 "남이 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중략)... 그런데 "남이 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글을 읽어야할 것인가?"
나는 발인 전날 밤 논문심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갔다. 이홍구 전 총리가 문상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조의금을 준비했으나 받지 않았고, 세째 아들부터 만나 "20년 전인가 자네가 컴퓨터 한 대를 우리 가족에게 주고 대금을 맏지 않은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갚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인 장남을 겨우 만나고 나오는 길, 동생의 친구라는 이대 박성희 교수와 조우했는데 그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