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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번역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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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퍼옴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1-30 00:00 조회2,3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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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번역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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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물량의 자수(字數)보다는 그 번역이 주는 감동을 중시하는 풍토를 고대하며-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번역자도 결코 우연히 되어지는 게 아니고 아마도 타고난 기질이 있는 사람이 되는가보다. 내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부터 웬지 모르게 영어가 그렇게 좋고 영어 시간만 되면 오던 잠도 사라지는 것을 느끼던 일이 결국은 평생을 영어로 먹고살 전조가 될 줄은 그 당시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학창 시절 영어 시간이면 영어 담당 선생님이 거의 매일 나로부터 §잘못된 강의§ 부분을 교정 받고 나가곤 했으며 영어 시험 답안을 채점할 때면 선생님이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내 답을 모범 답안으로 계시하곤 했던 일도 모두 나의 미래를 예언해 주지는 못했다.

영어와는 상관없는 전공을 택한 후 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과가 포함된 전교생을 대상으로 영어 경시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장원을 차지했을 때도 나는 그런 예감을 갖지 못했었다. 졸업 후 직장을 갖고 좀 한직이랄 수 있는 외근직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조용한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우연히 여가를 달랠 겸해서 손을 대기 시작한 번역이 본업으로 뒤바뀔 줄은 역시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서 들여다보게 되니 번역업계도 외부에서 느끼던 것처럼 그렇게 화려한 직업은 못되었다. 우선, 시초부터 내 번역문을 받은 후 번역료도 주지 않고 도주하는 업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그 때 번역료에 생계를 걸고 있었더라면 번역 일을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저 겸직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그 충격이 적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객관적이지 못한 기준을 근거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늘 번역료를 삭감하고자 애쓰는 이도 만나 보았다. 그나마 적은 번역료라도 제 때에 지급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우리 번역계에는 약속된 지급일을 어기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일인 양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아직도 더러 있다. 이는 모두 번역을 하나의 창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원론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다.

번역을 제2의 창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드물지 않게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지만, 현실로 들어가게 되면 까마득히 잃어버리고 마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며칠까지 품질은 크게 상관치 않으니 대충이라도 해 달라는 식이 아주 흔히 들을 수 있는 §번역 조건§이다. 따라서 번역료도 만족스럽게 줄 수 없다는 말도 늘 뒤따라오는 조건이기도 하고... 한국의 번역 시장은 아직 훌륭한 번역자를 구하기보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번역을 가장 값싸게 하는 사람을 찾아 구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슨 번역 작가랄 만한 사람이 나올 수가 없고 그런 수준의 번역가들을 통해서 번역되는 작품들이 세계 시장에 나아가 감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으며, 무슨 노벨상 같은 것을 탈 엄두는 아예 처음부터 내지도 못하고 있다.

옆의 나라 일본의 번역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어 있고 그들의 활발한 번역 활동을 통하여 이미 노벨 문학상도 여러 번 받은 경험이 있으며 사회 계층 중 번역가들의 위치가 언제나 상위 그룹을 차지한다는 상황과는 우리네의 처지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도 이 번역업계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알량한 §번역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다. 아마도 이를 일종의 사명이라고 해도 좋을 성싶다. 내가 아니면 이런 일을 통해 누가 이렇게 좋은 작업을 해 주랴 하는 자부심 내지는 일의 성취감이 나를 지금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고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번역 일을 사랑한다. 어느 때는 애인처럼 사랑한다고 스스로 느끼기도 한다. 만일 번역 일이 없었다면 내가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다. 아내가 부르는 것도 모르고 깊은 밤을 홀로 새우며 일에 빠져들 때의 희열감은 내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나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런 고로 나는 번역을 사랑한다. 자다가도 번역! 하면 깜짝 깨어 일어날 정도이고, 엊그제는 잠을 자다가도 번역하는 꿈을 꾸었는데 너무도 그 내용이 생생해서 빨리 가서 그 수정 작업의 마무리를 서둘러야지 하고 허겁지겁 이불을 박차고 나오다가 그게 현실이 아니고 꿈속의 작업이었음을 깨닫고는 혼자 쓴 웃을 지은 적도 있다.

그런 나의 모습이 결코 가식은 아니었나 보다. 나의 큰 딸 놈이 대학에 진학할 때 언어학과를 선택했다. 나는 더 좋고 더 보람을 주는 학과가 많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언어냐고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그 애는 종래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고 말았다. 내가 한창 반대할 그 딸애가 하던 말이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빠도 영어! 하면 자다가 깨어나잖아. 나도 중국어! 하면 자다가 깨어나게 된단 말야. 나도 이 담에 아빠처럼 번역하고 통역할 꺼야! 참으로 다행이다. 그 애가 보기에 내가 하는 이 일을 내가 즐기면서 하는 듯이 보였던 모양이니 말이다. 아빠가 즐기는 듯하니 자식놈이 따라 하겠다는 게 아니겠는가? 만일 내가 죽지 못해서 하는 일처럼 보였더라면 그 애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번역가가 되겠다고 나서겠는가? 자식에게 부러움을 사는 직업을 가진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 애는 자기처럼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고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는 친구도 많지 않다고 귀띔까지 해 준다.

나는 번역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다만, 내가 공들인 작품을 몇 번이고 되짚어 다듬고 또 다듬어 최소한 스스로 아쉬움이 없을 때 내놓아도 후회가 안 될 만큼 보상이 되는, 그렇게 풍요로운 우리 번역 업계로 발전하기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머지 않아 우리 번역 시장도 그렇게 변할 것이다. 양보다는 질을, 번역물량의 자수(字數)보다는 그 번역이 주는 감동을 중시하는 풍토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 추세가 그래 왔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번역을 통해서 세계 문학계가, 세계 번역계가 주목하는 작품들이 산출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 한 귀퉁이에서 나도 일조를 할 수 있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2002년 1월 14일 최도형


[번역가 최도형]20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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