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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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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8-24 01:07 조회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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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던 파리

곽중철 

 

“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able feast.” --- Ernest Hemingway, to a friend, 1950

귀하가 운이 좋아 젊은 시절에 파리에 살았다면 여생에 어디를 가든 파리가 귀하와 함께 할 것이다.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다.” 

‘노인과 바다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6162세의 나이에 미 아이다호 주에서 엽총으로 자살한 후 1964년에 그의 비소설 [파리는 날마다 축제다 A Moveable Feast]가 출간되었다. Movable feast는 엄밀히 말하면 가변可變 혹은 이동 축제로, 부활절처럼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축제다. 추수감사절 같은 '이동축제일(moveable feast)'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당신의 삶 속에 불쑥 나타나 생각나게 될 거라는 의미다. 위 문장은 이 책 표지의 소개 글 중 일부다. Never go on trips with anyone you do not love.”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여행을 떠나지마라)라는 말도 나온다. 헤밍웨이는 젊은 날의 파리 시절을 추억하며 카페와 바 이야기를 유난히 많이 늘어놓는다.

1953년생인 필자가 27-30세 이던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파리에 살았으니 헤밍웨이가 정의한 젊은 시절 파리에 산 행운아에 해당된다.

필자는 1979년 한국최초로 설립된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 1기로 입학해 꼭 1년만인 1980 9월 정부장학생으로 며칠 전 결혼한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갔다. 난생 첫 해외여행으로 앵커리지를 경유해 23시간 만에 도착한 파리는 모든 게 낯설었고 모든 게 문화 충격이었다. 1년 전 먼저 파리를 다녀온 불어전공 아내가 아니었으면 길 잃은 나그네가 될 뻔했고 평생 공처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3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눈물과 땀으로 농축된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다. 이 기간이 내 나머지 삶을 정의했던 것이다. 불어와 영어를 함께 익히면서 한국에서는 불모지였던 통역 공부를 끝내기에는 최단의 기간이었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유럽 학생들에게도 대학원 2년 과정을 최장 3년 내에 끝내야 하는 스파르타식 훈련과정이었다.

나의 파리 생활 3년은 개선문에서 동북 쪽으로 지하철 두 정거장인 파리 3대학의 통번역대학원(ESIT)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학교는 돌이켜 생각하면 참 고마운 학교다. 그 학교에 다닐 때는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고 내게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원망했지만 그건 지나친 이기적 기대였다. 우리정부나 우리학교에서 그 학교에 주는 대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학교에 매 학기 낸 것이라곤 우리 돈 5만원가량의 학생자치회비 뿐. 우리 정부는 내게 한달 500달러의 장학금만 보내주면서 그 학교에국제협력의 정신으로 후진국 학생을 공부시켜 달라고 배짱으로 요청한 셈이었다.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 개도국에서 온 학생실력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데도 퇴학시키지 않고 3년이나 무료로 공부시켜 수준에 이르게 하고 졸업 시켜 국제회의 통역 자격증까지 준 것은 프랑스라는 대국이 표방한 박애정신(fraternity)의 실천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데도 몇 년이 걸렸다.

그래도 나는 귀국 후 1년만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통역안내과장이 되어 후배들 10명을 그 학교에 유학 보내면서 내가 힘껏 확보한 넉넉한 체육부의 예산으로 보은했다. 재정난에 빠져 있던 그 학교 운영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원장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20세기 최고의 번역학자 다니카 셀레스코비치였다. 1985년 파리로 출장 가 유학생 파견 협력각서 서명을 위해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니 무슈 곽, 당신의 빛나는 출세(brilliant career)를 축하한다. 내 부친의 조국 세르비아 산 위스키로 계약 서명 기념 축배를 들자고 여장부다운 격려를 했다.    

Salle 7 (쌀르 쎄뜨)란 불어로 <7호 교실>이라는 말로 ESIT의 입구에 있는 약 50평 크기의 제일 큰 교실이다. 2001년 별세한, 20여년 에지트 원장을 역임한 그의 이름을 붙여 Danica Seleskovitch Hall로 불리고 있다.

그 건물이 옛 NATO 본부여서 Salle 7는 기존 동시통역 부스 3개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방은 특히 입학 초부터 졸업까지, 에지트의 통역학부 학장이 통역부 학생 100명 전체를 모아 놓고 통역을 강의했던 교실이다.

당시 학장은 Christopher Thiery라는 나보다 큰 프랑스인 교수로 영어와 불어의 Bilingual 이었는데 2년동안 통역입문 과정부터 동시통역까지 가르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악명높았다. 그 시간만 되면 모든 학생이 공포에 떨었다. 당시 모국어인 한국어를 인정받지 못하고 불어를 영어로 순차 통역하는 C-B 통역으로만 평가받아야 하는 별난 학생(Special-case student)이었던 나도 그 수업에 참석해 몇 달에 한 번쯤 통역 평가를 받았다. 학기말이 가까와 오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들 중앙에 통역자 책상과 걸상을 놓아 거기에 앉혀 놓고 수강생 100명 환시리에 통역을 시켰기에 무대 공포증은 더 컸다. 졸업시험 한달 전 나를 지명해 중간 좌석에서 그가 읽어준 캐나다 연사의 불어 연설을 죽을 힘 다해 영어로 통역했더니 수강생들의 의견을 물은 후 귀하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졸업시험 잘 쳐라고 격려해 준 교실이다.             

나는 1983 6 13일 동시통역 졸업시험 장소이기도 한 이 교실 맨 오른쪽 부스에 홀로 앉아 티에리 학장을 비롯한 파리의 내로라하는 4명의 현직통역사 시험관 앞에서 한영 동시 졸업시험 (제목: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순방 출국성명) 을 쳤고, 20점 만점에 18점을 받아 총 3개 시험 평균 16점으로 천신만고 끝에 졸업할 수 있었다. 기적같은 결과였다. 그날 밤 고향에서는 어머니가 폭포수 밑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꿈을 꾸셨다고 했다.

20056, 세계통대협회(CIUTI) 총회 참석 차 파리에 갔을 때 첫 회의에서 내가 <한국의 통번역 시장>을 소개한 것도 바로 이 교실이었고, 총회 기념 학술 대회에서 <한국의 TV 통역>이란 주제 발표를 한 것도 이 교실이었다. 특히 발표 때는 1983 6월 같이 졸업한 에지트 통역부 학장 Clare Donovan이 좌장을 맡아 나를 소개해 주었다.

22년만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처음으로 참석한 CIUTI 총회 장소가 이 교실이었고, 그 기념으로 열린 학술대회의 워크샵 4개 중 내가 주제발표를 한 통역관련 워크샵 장소가 또 이 교실이었고, 그 좌장이 나와 동기생이라는 사실이 꼭 우연의 일치로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장에서 이 설명을 들은 역시 에지트 번역반 졸업생인 이화여대 통대 최미경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은 일종의 숙명(fatality)>이라고 해석했다. 과연 그런 숙명이란 것이 있을까? 22년 만에 들어가 본 Salle 7는 개보수로 더 깨끗해졌지만 공포에 떨었던 22년 전보다는 어쩐지 좀 작아진 느낌이었다.

3년 파리유학을 했다고 하면 모두들 좋은데 여행 많이 했겠다, 고급 포도주와 프랑스 요리 많이 즐겼겠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500달러 장학금으로 차도 없이 지하철로 파리를 누볐고, 하루 세끼도 눈치 밥이었다.

19837, 파리에서 귀국하면서이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했는데 서울 올림픽을 하다 보니 몇 달에 한번씩, 1년에 4번 파리에 가기도 했다.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우리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수행하면서는 모터케이드로 샹젤리제를 지났고 그날 밤 묵었던 샹젤리제의 최고급 호텔 식당으로 파리에 주재하는 동기들을 불러 고급 프랑스 와인을 곁들인 최고의 만찬을 쏘기도 했다. 헤밍웨이 말처럼 파리는 내 나이 60까지 내 삶의 움직이는 축제가 되었다. 파리의 축제는 내 삶을 바꿔 놓았지만 잃은 것이 더 많지 않나 느끼기도 하는 것이 나의 최근 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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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던 파리    1960년 발표

노래 윤일로/ 작사 손로원/ 작곡 하기송

 

내가 울던 파리 내가 울던 파리

라일락 꽃은 피었건만 또 다시 피었건만

파리의 지붕 밑에 거닐던 그대여

지금 어디 사라졌나 사랑의 마돈나여

 

내가 울던 파리 내가 울던 파리

눈물의 추억만이 남아 또 다시 울던 파리여

파리의 지붕 밑에 거닐던 그대여

지금 어디 사라졌나 사랑의 마돈나여

 

내가 울던 파리 내가 울던 파리

눈물의 추억만이 남아 또 다시 울던 파리여      

 

인터넷 해설: 내가 울던 파리는 가수 尹一路(1935-2019) 1960년에 도미도레코드에 발표한 노래로 잊혀져 가는 노래였으나 조명섭에 의해 다시 빛을 발하게 된 명곡 중의 명곡이다. 짧은 노래지만 탱고 음률에 쉽게 젖어 들게 만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ccrL0AqrB3Y

【이 노래를 들으면 바로 한편의 삽화가 떠오릅니다. 라일락 꽃이 피는 계절에 떠나버린 그대, 다시 꽃의 계절은 돌아왔지만 계절이 끝나가도록 그대는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꽃말처럼 사랑의 시작이 아닌 사랑의 종말을 상징하고 있기에 라일락꽃은 약간의 아이러니네요. 처음 만난 인적이 드문 파리의 어느 지붕 아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보랏빛 라일락 꽃을 선물했으리라. 보랏빛 라일락의 의미를 알아챈 남자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되고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는 여자는 사라져가는 무정한 계절을 아쉬워하며 오늘도 파리의 지붕 밑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울지 마세요, 헤어짐은 다시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랍니다. 님은 떠났지만 아주 간 것이 아니 예요.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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