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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센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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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09-23 20:24 조회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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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센터의 추억

 

922“60년 역사연극의 메카사라지나라는 제하에 올해 말 계약이 만료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62년 개관 이래한국 연극의 메카로 불리며 다양한 창작극과 실험극을 배출한 서울 남산예술센터의 드라마센터가 100일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서울시는 2009년 남산예술센터의 소유주인 학교법인 동랑예술원(서울예대)과 임대차계약을 맺고 시 산하기관인 서울문화재단에 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20일팔 1월 동랑예술원은 2021년부터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연극계는계약이 끝나는 2020 12 31일 드라마센터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드라마센터에서는 개관 공연작인햄릿을 비롯해세일즈맨의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의 국내 초연 무대가 열렸고, 2009년 이후에는 김연수의 ‘7번국도’, 장강명의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같은 국내 주요 소설가의 작품이 각색돼 초연됐다. 연극계의 소중한 자산이 손에서 모래가 새나가듯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있다.

 

이 기사가 내 눈길을 끈 것은 생뚱맞게도 내가 소시 적에 영어연극 주인공을 맡아 드라마 센터의 무대에서 이틀 밤을 연기한 추억 때문이다.

 

내가 외대 영어과를 다니던 1972-1975년은 군사독재 반대 데모로 걸핏하면 휴교령이 내려지던 시절이었다. 19732학년 1학기에 날아온 징집 통지서(영장)는 미팅과 축제에만 정신이 팔렸던 내게 엄중한 현실로 다가왔고, 고심 끝에 학군단ROTC (지난 21일은 51년 만에 학군 출신이 육사 출신을 누르고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에 지원하는 결단을 내렸다. 3학년부터 수시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내가 내린 결론은 외대생들이 흔히 하는 외무고시 공부를 하지 못할 바에는 전공인 영어라도 열심히 해서 졸업과 제대 후를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에서도 영어가 출세의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ROTC 훈련을 받으며 학생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상태로 1년을 보낸 19743학년 말, 동생이 대학입시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같은 하숙집에 머물게 되자 이렇다할 일이 없었던 나는 4월에 공연될 영어과의 영어연극 출연자 모집에 지원했다.

 

당시 외대 영어과장이었던 고 이영걸 교수님과 연극감독인 미국인 라이언(Bill Ryan) 교수가 1975년 영어연극 후보작품으로 뮤지컬 South Pacific과 브램 스토커(Bram Stoker) 원작의 <드라큘라 백작>을 들고 결재를 받으러 갔더니 박술음 학장님이 금년에는 뮤지컬 보다는 특이한 흡혈귀 연극을 해보라고 권고하셨다고 했다.

 

추운 겨울날 난방도 안 되는 강의실에서 열린 오디션에 나갔더니 라이언 교수가주연인 드라큘라 역은 키가 크고 몸이 마르며 (당시 나는 180cm70kg 미만) 목소리가 강해야 한다고 했다. 주연을 지망했던 나는 다른 키 큰 남학생과 함께 더블 캐스팅이 되었고, 곧 연습이 시작되었다. 3월 개학이 되자 함께 연습하던 남학생이 포기를 선언했고 필자는 싱글 캐스트가 되어 4월 말 남산의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 이틀 4회 연극을 주연으로 모두 소화하는 영광을 누렸다. 감독은 미스터 곽만 있으면 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미국과 유럽에서 연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열정가였다.

 

그가 시키는 대로 영어대사를 외워 블로킹(대사에 몸짓을 붙임)을 시작하자 나는 연극이 참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누구보다 연습장에 일찍 도착해 폼 나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4월의 공연을 위해 드라큘라의 검은 망토와 이태리에서 직구한 흡혈귀 이빨까지 갖추고 막바지 연습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메소드 연기를 한 것이었다. 검은 관 속에 누워있다가 허리 힘으로 서서히 일어나 관중석으로 얼굴을 돌려 흰 송곳니 이빨을 드러내는 연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당시 외대 1년 예산의 반이 들어간다는 최대 행사였던 영어연극은 대학가의 관심을 끌었고 4회공연이 모두 만석이었다. 학교는 최대한 지원을 했지만 연극반 학생들의 준비는 서툰 점도 많았다. 대학구내에 있었던 사진관에서 찍은 행사 현장 사진들이 조명 미비로 거의 나오지 않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연극 장소였던 드라마 센터의 무대는 아담했다. 배우들이 연기도중 아래로 사라지는 장면을 위해 뒤쪽 무대에는 지하와 연결되는 작은 계단도 있어 나는 이틀에 4번 감쪽같이 사라지는 신출귀몰의 연기를 했다. 왜 수많은 배우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연극에 미치는 지 알 것 같았다. 군복무만 아니라면 졸업 후에도 계속 연극을 하고 싶었다.

 

이틀동안 괴성을 지르는 연기를 하다 보니 감독은 나보고 목소리를 아끼라(Save your voice, Mr. Kwak!) 고 당부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고, 4회 공연 후에도 내 목소리는 쌩쌩해 감독을 흐뭇하게 했다. 4회 공연과 커튼 콜이 끝나고 만난 감독의 미국인 친구들은 나보고 당신은 지금 당장 브로드웨이에 가도 드라큘라 역을 맡을 수 있다고 격찬을 해주었다.

 

그날 밤 대한극장 맞은 편 퇴계로 상가 고기집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나는 칭찬 속에 마신 위스키와 맥주에 대취하여 정신을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웬 침실에 어린 남자애와 같이 누워 있었는데 영어과장 교수 댁의 아드님 방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연기할 때 신었던 검은 부츠 신발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식당에서 업혀 나와 택시를 탈 때 신발을 벗었을 것이라고 그 댁에서 같이 잔 학우들이 추리했다.

 

과장 사모님의 해장국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교수님의 구두까지 한 켤레 얻어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 연극은 재미있었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지금, 죽기 전에 연극을 한 번 더 해보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 , 그리운 드라마 센터여

 

p.s. 아직도 거의 다 외우고있는 Count Dracula의 대사 중 영시 전공 과장 교수님이 가장 좋아 하셨던 대사는 다음과 같다.

 

You keep me? Me, the King of my kind?

 

You shall see. Five of my earth boxes you have polluted.

 

Have you found the sixth?

 

You have accomplished that much against me, Van Helsing.

 

But in a century I will wake, and call my bride to my side from her tomb,

 

My Lucy, my Queen!

 

(밴 헬싱은 네델란드에서 초빙된 퇴마사, 루시는 드라큘라의 희생양 처녀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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