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초음속 통역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10 15:16 조회1,262회 댓글1건

본문

 

“놀이기구 잘 만난거지마하1 깬 최초의 사나이 척 예거 하늘로


김은경 기자 입력 2020.12.08 20:47


인류 최초로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했던 시험비행 조종사 척 예거(97) 7(현지 시각) 별세했다.

척 예거가 25세이던 1948년 비행기 조종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9일 새벽 잠이 깨 인터넷을 열어보니 마하1 깬 최초의 사나이 척 예거 하늘로라는 기사가 떠있었고, 나는 1980년대 중반 시절을 회상했다. , 그가 아직 살아있었구나! 그는 1923년생이니 DJ와 나이가 같고, 미국의 키신저 전 장관, 정태수 회장과도 같지만 그들은 다 돌아가셨다.


1984년 봄이었을 것이다. 그가 서울에 왔다. 그의 나이는 61, 나는31살로 더블스코어였다. 당시 미국 공보원은 현 소공동 롯데 호텔 맞은 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라쿠치나라는 이태리 식당이 들어서 있다. 미국 측은 통역대학원이 있는 외대에 동시통역을 의뢰했고 나와 여성통역사 1명이 배정되었는데 그녀가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제일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던가. 농담이다.


그의 이름과 간단한 인적사항만 받고 미 공보원에 갔는데 그 전날 그와 만난 공보원 관계자가 빙긋이 웃으면서 쉽지 않을 것이다. 최선만 다해주라고 했다. 서울에 동시통역이란게 소개된 것이 몇년이나 됐을까? 19799월 통대가 생겼고 818월에 첫 졸업생이 나왔으니까.

 

공보원에 온 약 백명의 청중들 앞에서 통역을 시작해보니 등골에 땀이 났다. 그의 영어는 진짜 알아듣기 힘들었다. 1923년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니 생각나는 노래는


Country roads John Denver (1943-1997)


Almost heaven, West Virginia

Blue Ridge Mountains, Shenandoah River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Younger than the mountains, growin' like a breeze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All my memories, gather 'round her

Miner's lady, stranger to blue water

Dark and dusty, painted on the sky

Misty taste of moonshine, teardrops in my eyes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I hear her voice in the mornin' hour she calls me

Radio reminds me of my home far away

Drivin' down the road I get a feelin'

That I should have been home yesterday, yesterday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Take me home, down country roads

Take me home, down country roads

 

웨스트 버지니아 주는 깡촌(almost heaven 거의 천당수준)이었고, 1943년에 태어나 54세에 돌아간 존 덴버는 미국 촌놈이었으니 20년 먼저 태어난 예거는 말해 무엇하리? 당시로 치면 경상도 문경새재 출신이었다. 한마디 한미디가 초음속 항공기의 엔진소리가 났다고 할까? 그래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예거의 부음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예거는 1941 18세 나이로 공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정비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43년 예비 비행장교로 임관한 뒤 영국으로 파병됐다. 2차대전 중 그는 64개의 임무를 수행하고 13대의 독일 비행기를 격추했다.종전 이후에는 공군의 시험 조종사로 여러 고난도 시험비행에 참가했다. 1975년 준장으로 퇴역했다. 수백 대의 군용기를 비행하며 1만 시간 이상을 하늘 위에서 보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그는 생전나는 그저 나한테 딱 맞는 놀이기구를 만난 운 좋은 아이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예거의 부인 빅토리아 예거는 트위터를 통해 부고를 전하며너무나 슬프게도, 내 인생의 사랑인 척 예거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빅토리아는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삶을 살아간 미국의 가장 위대한 조종사, 그가 남긴 용기와 모험심, 애국심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예거는 공군 대위이던 1947 10 14, 미국 우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개발된 실험용 로켓 비행기 X-1’을 마하 1.06, 약 시속 1126km의 속도로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X-1은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B-29 폭격기에 실려 발사된 뒤 상공 4 3000피트( 1 3000m)까지 올라갔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음속 이상으로 비행하면 충격파에 의해 폭파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예거는 이를 불식하고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The fastest man aliv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5 9 4(현지 시각) 캘리포니아주 에드워즈 공군기지, 척 예거가 자신이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했던 벨 X-1 항공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8세에 공군에 입대했으니 고졸의 학력이었고, 항공기 정비병부터 시작했으니 자신의 영어는 비행기 엔진 소리에 파묻혔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음속과 조종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를 갖고 갔는데 그의 발언은 문자 그대로 소음이었고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감해하면서 1시간가량 통역을 마치고 보니 청중도 주최측도 당황하고 있었다. 미국 관계자는 그제서야 미안해 하지말라. 미국인들도 잘 못 알아들었다고 했다. 통역사가 고객의 위로를 받으며 나온 내 최초의 통역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의 명복을 빈다. 

 

미국인의 발음 때문에 고생한 경험은 우연의 일치로 그와 동갑인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통역할 때였다. 1987년 봄이었나, 그가 방한해 주요인사들을 만나는데 올림픽조직위원장을 하다가 여당인 민정당 대표로 차출된 노태우(1932년생 88)씨가 그 중 한명이어서 공평동의 당시 민정당사로 갔다. 면담에는 봉두완(1935년 태생이니 현 85) 민정당 대변인, 그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 영어를 잘 했다. 면담이 끝나자 봉 선생은 나보고 키신저 발음이 알아듣기 힘든데 통역 잘 하시네요해서 기분이 좋았다. 키신저의 영어는 그 특유의 허스키 음성과 함께 지식과 정보가 넘치지만 지독한 독일 발음으로 악명이 높았다. (요새 내가 쓰는 글에 자꾸 등장인물의 나이가 등장하는 것은 내 나이를 자각하는 무의식의 발로임을 이해 바란다.)

 

키신저의 생애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에서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Heinz Alfred Kissinger)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2차 세계 대전에도 종군하였고,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수마 쿰 라우데(최우수) 등급),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거기서 국제 관계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1969년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안보 보좌관으로 합류했다. 1973년에는 윌리엄 P. 로저스 국무 장관이 사임하자 56대 국무 장관이 되었으며, 포드 행정부때까지 그 직을 맡았다.


업적


문화 대혁명 기간이었던 1971 8월 대통령 안보보좌관이던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북경을 극비리에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 2 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1] 1969년과 1973년 사이에 그는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북베트남의 외교관들과 비밀적으로 협상을 지도하였다. 1973년에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사이에 휴전 조약인 이른바 파리 협정이 맺어졌다. 그 공로로 북베트남 교섭인 레득토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레득토는 수상 거부) 그러나 그 조약은 종이 조각에 불과, 전쟁이 2년 더 계속됐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관련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이스라엘군의 해체할 동의서 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닉슨과 포드 정권 아래 빛나는 외교 정책을 펴낸 것으로 알려졌다.

 

주장


"미 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공화당과 종교적 우파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사실 조심스러운 진보주의자이다. 사회가 지나치게 빨리 개혁될 때는 변화의 속도를 늦추고, 사회가 전혀 개혁되지 않을 때는 온건한 변화를 촉진하는 사람이다."[2]

 

저서


그가 쓴 저서로는 〈핵무기와 외교〉(1957)와 그의 추억을 쓴 〈백악관 시절〉(1979), 〈대변동의 세월〉(1982), 〈부흥의 세월〉(1999) 등과 최신작 <중국에 관하여>(On China)(2011)가 있다. ()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