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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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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2-26 16:54 조회2,80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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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함


나와 인연이 있는 어른 한 분이 또 돌아가셨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내가 그 분을 처음 뵌 것은 1988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올림픽 조직위 통역안내 과장이었고, 그는 이화여대 교수 겸 기호학연구소 소장이셨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개회식 내용 점검이 한창이었을 때, 사상 최고의 행사를 만들겠다는 의욕에 불타던 고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주재로 방이동 올림픽 회관에서 점검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도 무선 마이크를 돌려가며 진행하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 날은 이상하게 나도 회의참석 지시를 받았는데 통역관련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보니 이 교수님은 버스 앞줄에, 나는 중간 쯤 앉게 되었다.

 

몇 가지 개회식 내용 점검을 끝내고 이 교수가 또 하나의 기발한 제안을 했다. 최고의 개회식 내용을 현장의 모든 관중에게 충실히 전하기 위해 다국어로 통역을 하자는 말씀을 마치자 박위원장은 내 의견을 물으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결국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의 내용은 6개 국어로 동시통역되어 관중들은 당일 지급된 초소형 무선 라디오로 이를 들었는데 나는 대회 통역 담당관 입장에서 버스 회의장에서 이 계획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어폰을 끼는 것은 사람에게 불편한 동작이고 눈앞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생일대의 장관에 환호를 보내는데 세세한 설명은 공연 전후에 소개 책자를 봐도 된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누가 귀에서 들리는 작은 통역 소리에 집중하겠는가? 좋은 행사 분위기를 깰 뿐이다”.

 

천하의 아이디어 맨인 이 교수는 내 주장에 약간의 불쾌함이 섞인 반론을 폈고 박 위원장은 급히 논쟁의 비화를 막았다. 35살의 새파란 (조직위 최연소 과장) 서기관과 53세의 석학교수가 붙은 것이다. 결국 이 계획은 강행되었고 개막식이 며칠 남지 않은 시기에 나는 다시 그 긴 개폐회식의 시나리오를 그것도 6개 국어로 밤새 번역시키고 현장 통역사를 수배하는 등 마지막 깔딱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이교수를 원망하면서... 그와의 인연이 또 있을 줄도 모른 체... 

 

내가 두 번 째로 이 교수님을 뵌 것은 20076, 이대 통역대학원 설립 1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외대 통역대학원장 자격으로 축사를 할 때였다. 관련 국제학술대회의 기조연설을 하려고 단상에 앉아 계시던 교수님 앞에서 나는 에피소드로 올림픽 준비 시절 그와의 인연을 언급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와의 마지막 대면은 그로부터 약 12년 후인 20197월 한국외대 대학원의 40주년 기념 행사 직전이었다. 나는 행사조직위원장으로 축사를 해줄 저명인사 중 하나로 이 장관님을 섭외 중이었다. 대학원 동료 교수의 지인을 통해 축사 요청을 하니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 그러나 암 투병 중인 그의 건강이 문제였다. 멀리 출타를 할 수 없어 힘들겠다는 통보에 영상 연설을 부탁드리는 걸로 방향을 틀었다.

 

행사 사흘 전인 7 2 11시 자신의 평창동 영인문학관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급한 김에 조교에게 촬영 및 편집 기사를 구해 별도로 오도록 하고 나는 평창동으로 직접 차를 몰고 갔다.

 

15분 대기 후 나타난 이 교수는 환자 같지 않았다. 자신은 그게 문제라면서 평생 해 온 강연만 시작하면 힘이 난다고 했다. 나는 먼저 그와의 두 가지 인연을 언급했다. 그는 그제서야 온화한 눈빛으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원고 없이 꼬박 한 시간 동안 언어와 통역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 15분 간 요약을 할 테니 그걸 영상 연설로 쓰라고 하셨다. 스스로 얘기한 후 마지막에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관록貫祿이었다. 12시 반쯤 녹화가 끝나자 기분이 좋으셨던지 점심을 먹으러 가지고 했다. 내 차로 그의 차를 따라가 가까운 작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1시간 퓨전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그는 강연을 계속했다. 나와 조교 2, 3명의 청중이 맘에 드시는 듯했다. 당신이 계산을 끝내고 차를 타실 때 이별을 고했다. 부디 장수하시라고

 

그 후 암 환자로 신문과 TV에 출연하실 때도 비슷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별세 전에 그를 만나고 식사까지 함께 한 후학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영광이다. 혹자는 그가 언어 자체에 너무 천착한다고 하지만 그런 말 유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는 희대의 석학이었다. 그는 우리가 드리려던 축사사례비도 받지 않아 행사 예산 절감에 도움을 주셨다. 개회식 도중 그의 축사를 한영 통역으로 들은 해외 학자들은그는 도대체 누구냐? 축사 내용이 범상치 않다. 번역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로부터 27개월 후인 오늘 그는 영면했다. 그동안 그의 투병기사를 보면서 나는 진정 존경하는 마음으로 건강과 만수무강을 기원했었다. 이제 그가 늦게 영접했던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란다.   


 

댓글목록

곽중철님의 댓글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서울연합뉴스2021-10-29 ) 노태우 정부 당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시(弔詩)를 띄웠습니다. 이 전 장관은 병상에서 쓴 글이라며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라는 제목의 조시를 보내왔다고 하는데요,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났다거나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위에 오솔길 내시고' 등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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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장관은 "병문안도 드리지 못한 채 불경스럽게 조시를 쓰고 있는 저의 참을 수 없는 아픔을 통찰해 달라"는 글도 함께 유족 측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어 지난 28일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고, 노 전 대통령의 국가장을 주관할 장례위원회의 유족 측 장례위원에도 이름을 올렸다고 하네요.

곽중철님의 댓글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는 이 글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 그의 부고를 듣고 급히 글을 썼으나 읽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 그래서 인간의 기억을 믿지 말라는 거구나. 살아가면서 일기를 쓰거나 고비가 있을 때마다 메모를 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나는 모교에 임용 되자 말자 가족이 이 홈피를 만들어 줬기에 그나마 4년 전 정년 비망록도 쉽게 책으로 낼 수 있었다. 가족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