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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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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08 18:30 조회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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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할이 바람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국민교육헌장 전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 12 5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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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내 나이 15살, 중학 2학년 말에 이 헌장이 발표되었다. 일본어 세대인 부친은 어느 날 아침 형제에게 이 헌장을 다 외워보라는 숙제를 내리고 출근을 하셨다. 나는 멋 모르고 헌장을 읽으며 외우다가 금방 숙제를 잊어 버렸다.


 

이른 저녁 퇴근하신 부친이 형제들에게 다 외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단숨에 읊어버렸다. 이 때 부모님과 형제들의 놀란 눈빛이 평생 내 말 공부를 가속 시킨 비결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생각한다.   


지난 70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40년을 통역 전공으로 살아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요,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3대 도시였지만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서울의 한국외대에서 미국인 교수를 첫 외국인으로 접한 촌 놈이 한국 최초의 통역사 중 한 사람이 되다니지금도 내가 어찌 외국어를 전공해 평생 밥벌이로 삼을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경북중학교 2학년 영어시간에 미국에서 단기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영어선생님(이상석)을 만난 것도 운명이었다. 다른 영어 샘들보다 젊고 발음부터 달랐다. 문장마다 노래 같은 인터네이션을 강조하다가 갑자기 교과서 한 과목을 통째로 암기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친구들은 픽 웃어넘겼지만 그렇지 않아도 영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나는 어렵지 않게 숙제를 했다.


수업시간에 이 선샘은 다 외워온 사람?”이라며 반신반의 질문을 던졌다. 잠깐의 침묵 후 내가 자원해  과목 전체를 다 암기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란 이샘은 이 반에서 영어를 잘 할 놈은 중철이 뿐이라는 극찬과 함께 수업을 마쳤다. 친구들은 놀람과 시샘으로 날 바라봤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나는 영어에서 앞서기 시작했고 그것이 대학입시까지 이어졌다. 

 

대학 1학년 영어회화 시간에 미국인 여성교수(성명을 잊음)‘1분 스피치문장을 써오라는 숙제를 냈고 나는 무심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유치한 발표를 했는데 아주 좋은 발표였다. 쉽고 문법에 맞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작문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서울 출신 친구들을 뒤로 하고 영어에서 더욱 앞서가는 계기가 되었다 고래가 다시 춤을 춘 것이다. 

 

대학 4학년 때 우연히 맡게 된 영어연극 주인공 역할에서 날 뽑은 미국인 교수(Bill Ryan)는 내 재능을 알아보고 특별지도를 해주었다. 더블캐스팅이 된 친구가 내 위세에 늘려 자퇴하자 샘은 괜찮다. 미스터 곽만 있으면 된다고 했고, 나는 춤추며 미친 듯 연기를 했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총 4회 공연이 끝나자 그는 공개적으로 "공연을 본 미국인 친구들이 미스터 곽은 당장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도 드라큘라 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해 날 우쭐하게 했다.  

 

통역대학원 1기 입시 면접에서 한//불어과를 지원해 불어로도 인터뷰를 했는데 담당 프랑스 교수(Roger Leverrier)가 심사 평에서 불어는 아직 잘 못하지만 이 학생은 통역사 가락이 있다. 통역사 자질이 있다고 해서 합격이 되었고, 1년 후 정부 장학생 선발 시험에서 1등을 해 파리로 유학하게 되었다.

 

파리 대학원(ESIT)에서 만난 프랑스인 교수(Christopher Thiery) 3년 동안 애증이 엇갈린 관계였다. 그는 어릴 때 해외 체류 경험도 없어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3년의 수학 및 졸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졸업 시험을 앞둔 마지막 수업 시간, 100명의 동기생들 앞에서 내게 불영 통역을 시켰다. 울부짖듯 통역을 마친 나에게 그렇게 발전할 줄 몰랐다. 졸업 시험을 잘 쳐라고 공공연히 격려했고, 나는 두 번째로 졸업 시험을 통과한 한국인 학생이 되었다. 

 

시험 결과 발표장에서 오늘은 두 명이 합격했는데 축하한다. 미스터 곽, 이제 우리는 동업자(colleagues)”라고 격려해주었다. 졸업 후 16년 만에 외대 통역대학원의 교수가 되어 입학생 전체에 대한 통역입문강의를 20년 동안 맡았는데 나도 모르게 티에리 교수의 교수법으로 그를 흉내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라면 "Swim or sink!" 였다.   

 

그 후 40년 동안, 20세에 미국인을 처음 접하고,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 못 가봤던, 경상도 사투리에 원어민과는 거리가 먼 내가 외무부 장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을 통역할 수 있었던 것은 8할이 바람인 운명 속에서 위 다섯 분 스승의 칭찬을 받은 덕분이었다. 재능을 타고난 후배나 제자를 보면 가슴이 뛰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르베리에 교수와 라이언 교수는 부음을 들었지만 티에리 교수는 아직 생존해 계실 텐데 그의 장례식에 만큼은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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