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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별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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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19 15:49 조회2,764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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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별난 일들

 

20227월 한국외대 명예교수 곽중철

 

19845월에 스카우트되어 198812월까지 일한 서울올림픽조직위에서 나는 초대 통역안내과장을 거쳐 행사 당시에는 인력국 언어담당관으로 뛰었다. 지금도 올림픽공원의 기념비에 우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선 나는 과장이 되자마자 대회참가에 관심이 많았던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조직화 했다. 을지로 1가 외환은행 본점 사무실 앞에 있는 햄버거 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인류애를 다진, 특히 여성 외국인 아줌마들은 약 500그들은 자원봉사 통역이 되어 대회 분위기 고조에 큰 몫을 했다. 곁에는 우리가 선발 교육한 만명에 달하는 국내 통번역 봉사자도 물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아직 전문 통번역이 모르던 조직위에서 해외 전문 통역사 50, 번역사 50명을 섭외해 대회에 투입함으로써 국제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했다. 이 인력은 각종 기자회견과 경기장 인터뷰에서 위력을 발휘해 개도국 한국에서 전문 통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예산이 많이 들어갔지만 이 경험은 추후 내가 맡은 국가대사에 최소예산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내가 과장이 되기 전외무부에서 과장을 뽑아야 한다던 전직 대사 출신 간부는 1988년이 되자나의 판단 미스였다. 곽과장이 아니었다면 대회 통번역이 이만큼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1986년에는 한국어 영/불 통역사 양성을 위해 체육부에서 예산을 따내 국내 4, 국외 4명 총 8명을 내 모교 파리통역대학원ESIT에 유학시켰다. 1년 반 후 돌아온 그들은 대회 언어 서비스에서 올림픽 공식언어인 영/불어를 한국어로 동시통역해 세계무대에 뽐냈다. 내게 더 흐뭇한 사실은 그들이 파리에서 나같은 어려움이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공부하고 왔다는 것. 그들이 그걸 감사하든 말든…            


올림픽이 끝난 후 1989년부터 1990년 말까지 2년동안 나는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홍보실장으로 일하면서 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대통령이 된 노태우 님을 통역하려 청와대 출장통역을 나가다가 마침내 199011월 대통령 공보 비서관(3)겸 통역관으로 발령 받았다. 그 때까지 대통령 통역은 외교관 출신의 의전수석이 맡았었다. 그 시대 분위기는 대통령 통역은 대통령의 연륜을 살릴 수 있는 나이 지긋한 남성으로 국한돼 있었다.

 

내가 파리 통역학교를 나와 5년이나 노태우님을 영/불어로 통역했지만 22살의 나이 차이는 여전했고, 그 결과 정상회담 등 굵직한 행사는 대사급 의전수석이나 나이든 미국 대학 정치학 박사 출신 비서관을 시켰고 나는 꾹 참고 대통령의 불어통역, 만찬통역이나 행사통역 그리고 영부인의 영/불어 통역을 전담했다. 그걸 두고 호사가들은 실력이 없어 영부인 통역만 한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6공화국이 끝나고 1993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종합유선방송위 관리국장으로 일했는데, 역시 우리가 처음해보는 유선방송 프로그램 업체 선정이라는 대업을 대과 없이 끝내고 업체 중 보도 전문 채널인 YTN의 부장(대우)으로 옮겨갔다.


1980년경 출범한 미국의 CNN을 본 딴 24시간 뉴스채널 YTN에서 역시 사상 처음 해보는 뉴스 전문 방송사의 외신 담당으로 나는 24시간 내 청춘을 불살랐다. 사상 최초의 위성통역실을 만들어 매일 1시간 해외뉴스를 편성하고, CNN 등 방송이나 AP, UPI 같은 통신사들과 위성 수신 화면의 발췌권을 협상해 계약을 맺었다. 지금도 후배들과 함께 한 전쟁통역, 미 대선 토론 통역, 혼자 한 다이애나 비 장례식 통역 등을 추억하면 다시 가슴이 뛴다. 기자 체질인지도 모른다. 


19993월 모교 통역대학원 전임교수로 임용돼서는 혼란스러운 모교를 안정적으로 바로잡고 훌륭한 제자들 양성에 발벗고 나섰다. 1년도 되기 전에 가르치는 일이 내 천직임을 깨닫고 더욱 정진했다. 1기 졸업생으로 한국통번역사협회(KATI)를 만들어 국내 통번역사들의 모임과 우의증진을 도모했고, 세계통대협회(CIUTI) 이사로 2006년 서울 총회를 주최했다.

 

2017년엔 세계번역가연맹(FIT)의 이사가 되어 중국이 독점하던 아태 통번역 포럼(APTIF)을 주최해 모교 설립 40주년을 기념했다. 뜻있는 후배교수들은 말한다. “이 모든 기록이 그가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것들이었다. 이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후 통대 50주년을 맞아도 40주년만큼 큰 행사는 없을 것이다. 그가 없으니까…"

   

※ 경력

1976.03육군 소위 임관(학군 14/공병 통역장교)

1976.071978.06육군행정학교 영어교관/대통령경호실 번역관

1978.06육군 중위 예비역전역

1978.081979. 9 현대건설 근무

1984.051988. 12 서울 올림픽 조직위 통역안내과장/수석통역사

1988.02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 가입(한국인 1)

1989.011990. 11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홍보실장

1990.111993. 5 대통령 공보 비서관(3)겸 통역관

1993.051993. 12 종합유선방송위 관리국장

1994.011999. 2 YTN 국제부장/위성통역 팀장

1999.03외대 통역대학원 전임교수 임용

1999.08 ~ 2001.07외대 통역연구소장

2000.10서울 ASEM Ⅲ 정상회담 통역조정관

2001.01CSTV Korea CNN 동시통역조정관

2001.08한국외대 BK21 특화사업단 통역번역센터 소장

2001.09월드컵 조직위원회 통역자문위원

2002.05~06월드컵미디어센터 통역담당관

2002.112차 외교통상부 민주공동체 서울회의 통역 및 조정

2003.01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위원회 자문위원

2003.05법무부 세계 반 부패회의 통역 조정관

2003.08대구 유니버시아드 통역 자문 및 통역

2004.05세계여성지도자회의(GSW) 통역 총괄

2004.09대검찰청 제9차 세계검사협회(IAP) 연례총회 통역 총괄

2004.09외교통상부 UNDP Good Governance 회의 통역 총괄

2004.10삼성전자 상해 글로벌 로드쇼 통역 총괄

2005.05행정자치부 정부혁신세계포럼 통역 총괄

2006.0213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장 보임

2006.05국제통번역대학원협회(CIUTI) 서울 총회 주관

2006.08한국외대 외국어사업본부 통번역원 원장 보임(겸임)

2006.1016차 세계빌딩관리 연맹 서울대회 동시통역 담당

2006.1215회 도하 아시안 게임 한영 통역사 10명 선발 파견

2006.05-2009.06세계통번역대학원협회(CIUTI) 이사

2007.12현재 ()한국통번역사협회(KATI) 이사

2009.06보건복지인력개발원 의료통역사 양성 통역 책임교수

2010.11G-20 서울 정상회의 통역자문위원

2010.11광저우 아시안게임 기자회견 영어통역

2011.04대구 세계육상연맹(IAAF) 이사회 통역 총괄

2011.06 세계검사협회(IAP) 총회/ 검찰총장 정상회의(WS) 통역담당

2011.08 대구 세계육상대회 기자회견 통역담당

2011.11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 통역자문위원

2012-2015 한국통번역사협회(KATI) 3대 회장

2014.02 한국외대 연수평가원장/평생교육원장

2014.08 한국외대 통번역센터장

2014.09 인천아시아 경기대회 MPC 기자회견 동시통역 담당

2017.08 세계번역가연맹(FIT) 이사 선임

2018.08 한국외대 정년 퇴임/통번역센터장 촉탁 1년 근무연장

 

2019.07 통번역대학원 40주년 기념행사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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