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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내 인생의 뒷 얘기들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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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24 09:42 조회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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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올림픽 조직위 취업


귀국해서 학교에 신고하고 대학원 건물 1층 통역센터에 진을 치면서 고 프리랜스로 뛰기 시작했다. 당시 하루 통역료가 20만원. 1983년 가을, 첫 일로 전 서울고교 운동장에서 국제양궁협회의 국제심판 양성훈련을 통역했는데 이틀째 되던 날 한국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던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사장이 와서 강의를 참관하고 오전 통역을 마친 나보고 산책을 제안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정사정은 내 ROTC 2년 선배로, 아버지를 닮은, 말이 통하는 잘 생긴 사내였다. 정주영 회장이 유치에 큰 힘을 쏟은 덕분에 우리가 주최하게 된 서울올림픽의 조직위원회에서 통역안내과장으로 행사를 마쳤다.

 

10여년 후 정회장의 명령(?)으로 정몽준 당시 한국축구협회 회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를 유치해 일본과 공동 주최하게 되었고, 나는 또 월드컵 대회를 통역하면서 정몽준 회장을 자주 보게 되었다. 정주영 회장은 공동개최 결정 소식에 막내아들을 보고니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하고 핀잔을 줬다지만 부자는 모두 애국자였다. 

 

귀국한 지 1년도 안된 당시 1984년 봄, 올림픽 조직위 수석통역사로 스카우트되었고, 노태우 당시 위원장을 통역하다가 1984년 말 신설된 통역안내과의 과장이 되었으나, 월급이 세후 100만원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5년 나는 30대 초반을 한국이 첨 해보는 올림픽을 위해 동분서주, 분골쇄신, 질풍노도처럼 뛰었다. 1986년 딸의 태생을 보지도 못하고 불철주야 일한 결과, 아들도 하나 없이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7.  청와대 행정관 자리 포기하고 IPECK 선택


1988년 초 대통령이 된 노태우 씨는 의전 비서관에게 곽 군은 일단 국가대사인 올림픽을 마치고 청와대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민정당사에서, 청와대에서 노통 만찬행사 자원봉사 영어, 불어통역을 했다. 그러다 올림픽이 끝난 198810월 청와대 구본관에서 통역을 마치고 의전수석을 만났는데 비서관 자리가 없으니 일단 행정관으로 의전비서실에 합류하겠냐고 물어 나는 당돌하게 그렇다면 외부애서 일하다가 청와대에서 부르면 와서 자원 봉사하겠다고 선언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또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취업한 곳이 외교관계가 없는 중국, 몽골, 동구국가 등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IPECK이었고 홍보실장 직을 맡았다. 사무실은 삼성역이 있는 무역협회의 코트라 사무실 위 27층이었다.

 

거기서 미수교국들에 출장도 가서 재미있는 경험들을 했지만 내 마음은 콩밭, 즉 청와대에 가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는 국빈만찬 통역 중 만난 노통은 자네 요즘 어디에 있나?”고 물어 IPECK에 있다고 했고 그러다가 약 2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1990년 가을 어느 만찬장에서 나는 드디어 노통께 각하, 이제 당신 곁으로 불러 달라고 했고 노통은 , 내가 또 깜빡했구나하면서 가까이 있던 노재봉 비서실장에게 귓속말로 곽중철을 비서관으로 발령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그 해 11월 나는 3년 만에 공보비서관이 되어 춘추관으로 출근했다. 최연소 비서관이었다.

 

8.  김복동 장군 워싱턴 출장 동행요청 거절


중국과의 수교 전 양국 교류증진을 위해 정부와 KOTRA가 만든 조직인 민간경제협의회IPECK의 배후 실력자는 노태우 씨의 처남이자 김옥숙 여사의 오빠인 김복동 장군이었다. 술을 좋아하던 그도 차기 대권주자 중 한사람이었다.

 

김복동 장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1] 1980 7월 초 전두환 사령관보다 군번이 빨라 정규 육사 출신 중 제일 상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전 사령관에게 한 번도형님이라고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2] 몇 시간 후 밤 늦은 시간에 음식점 마담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복동 장군이 상을 뒤엎는 바람에 술자리가 난장판이 돼 버렸어요. 실장님(김충립)이 빨리 오셔서 정리를 좀 해주세요….”

 

다음 날 아침 정호용 사령관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직을 노태우 장군에게 양보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기미도 역력했다. 이 술자리가 있은 지 3주 뒤 노태우 사령관은 10·26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복동 장군(10·26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을 전역시키려 했지만, 정호용 사령관이 나서 김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승진 발령 나도록 도왔다. 2012년 봄 정호용 장군이 밝힌 이야기다.

 

1989년 김장군은 미국 재야와의 안면 트기를 위해 워싱턴 여행을 분비하면서 영어 통역사를 구했고, IPECK의 황인정 부회장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천거했다. 그러나 나는 싫었다. 처남인 노태우를 통역해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IPECK으로 가게 해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젠 손위 처남을 통역하라고? 내 심정은 이랬다.

 

나는 통역하는 기계나 앵무새가 아니다. 지난 6년 이상을 노태우라는 사람을 믿고 주야로 통역을 했는데도 이렇게 찬밥 신세인데 또 처남까지 통역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에서 고작 수고 비 몇 달러 챙겨주겠지. 그래서 싫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그 때 미국을 갔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지난 6년 노태우의 주야 통역에 지쳐 있었고, 이제는 개인 통역을 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확고했다. 윤석열처럼 나는 특정인을 통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랄까?

 

미국 출장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각종 핑계를 댔다. 심지어는 여권이 만료되었다고 했더니 외교관 여권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결국 황 부회장한테 내 속마음을 전하고 미국 수행 후보 명단에서 날 빼 달라고 했다. 황 부회장은 날 이해 못했다. 그 좋은 워싱턴을 실세인 김 장군 따라가라는 데도 거절하는 날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김장군은 200041967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횡부회장도 2013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명복을 빈다.    



[1]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노태우 의리 테스트술상 뒤엎은 김복동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입력2016-08-23 10: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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