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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에 음주는 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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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8-11 08:31 조회2,72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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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에 음주는 금기다            1984년의 경험

 

위성 중계가 시청자들에게도 익숙해질 만큼 심심찮게 동시 통역되던 84년 봄,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미국이 침공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설명하기에 바빴던 그 날 저녁, 나는 서울에 온 파리 통역 대학원의 은사 드장 여사를 모시고 저녁을 먹었다. 채식주의자인 그녀를 위해 후암동의 절간 음식점에서 파리의 추억을 포함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도 모르게 동동주를 거나하게 마셨다.

 

        택시로 호텔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고 귀가한 시간이 밤 11시였는데 KBS에서 나를 찾느라 난리가 났단다. 전화를 해 보니 다음날 아침 여섯 시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그레나다 사태와 관련한 특별 담화를 발표하는 것을 위성 중계하기로 결정했으니 나와서 동시 통역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술이 덜 깨 있었던 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마시고 늦게 돌아와 아무 준비 없이 그 어렵고 중요한 통역을 할 수는 없다고 간곡하게 사양하면서 다른 사람을 쓸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방송 담 당자는 완강했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여러 후보자를 물색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고 녹화가 아닌 완전한 생중계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수백만 시청자들을 위한다는 '방송의 공공성까지 들먹이며 다음날 새벽 다섯 시까지 나와 줄 것을 애소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한 나는 사태를 보도한 그 날 신문을 찾아 상황 파악에 나섰지만, 술 취한 정신에 많은 것을 건지기가 불가능했다.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신 술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다섯 시까지 여의도 방송국까지 가려면 네 시 전에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졸리고 아픈 머리를 무릅쓰고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방송국에 도착해 보니 야근자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자판기에서 독한 커피를 두 잔이나 뽑아 마시고 마이크 앞에 앉았으나, 몸의 컨디션까지 형편없으니 통 자신이 서지 않았다.


 

통역은 특히 술기운이 있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자신이 직접 하는 말이나 노래는 한두 잔의 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말을 전달하는 통역은 우선 남의 말을 정확히 들어야 하는 과정 때문에 머리는 백 짓장처럼 맑아야 하고 몸은 쾌조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야 유리 하다. , 만찬사 통역 전 남들과 함께 포도주 한 쯤이야 하고 마신 후, 통역 마이크 앞에 서면 아무리 간단한 내용이라도 마음대로 흡족 한 통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 체험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통역 마이크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 시 간여 ...... 흑백 모니터에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의 그 림이 흘러 들어오고 우리측 앵커의 간단한 안내 말이 있은 후 드디어 레이건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통역을 시작했지만, 역시 깨끗한 통역이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채 20여 분이 흘러 갔다.


그 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자 나는 이어폰을 팽개치고 방송실을 나왔다. “수고했다.”고 붙드는 방송 담당자들에게컨디션이 나빠 잘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방송국을 나섰다. “어젯밤에 단호히 통역을 거절할 것을 .......” 하면서 후회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부끄럽고 착잡한 마음으로 통역 대학 원에 둘렀더니, 전날 밤 통역사를 구하는 방송국의 전화를 받았던 직 원이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다릅디다.”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닌 가? 그 다음에 만난 후배들도 비슷한 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전문 통역사의 양심에 비추어서는 아쉬움이 큰 통역이었다. 그러 나 파리에서 모욕을 받으며 모든 것을 걸고 배운 통역, '호랑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고 죽자 살자 덤벼들었던 그 날 새벽의 안간 힘에 보람을 느꼈던 통역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 가며 양 방송 국을 드나들면서 함께 일한 기자나 PD들은 대통령 공보 비서관이 된 지금도 서로 기억하고 있어 도움이 되고 있다. 91 1월 걸프전이 발발하여 CNN이 현지에서 특종 보도를 시작하 자 TV 방송들은 다시 위성 중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방송사들은 황급히 동시 통역사들을 불렀다. 유능한 통역사를 구하지 못한 한 방 송사에서몇 년 전의 곽중철을 찾아라.”는 소리가 나와 청와대 출입기자가 나에게 의사를 타진해 왔지만 직책상 불가능했다. TV를 보면서 나는 당장이라도 방송국으로 뛰어가 통역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걸프전은 TV 통역료를 더욱 올려 놓았고 쥐꼬리 만한 통역료에도 불평하지 않고 미친 듯 통역했던 이 선배는 “TV동시 통역을 개척했다.”는 아무도 모르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지금도 후배들의 TV통역에 귀 기울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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