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이 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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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0-31 17:04 조회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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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76.03 육군 소위 임관(학군 14기/공병 통역장교)
1976.071978.06육군행정학교 영어교관/대통령경호실 번역관
1978.06육군 중위 예비역전역
1978.081979. 9 현대건설 근무
1984.051988. 12 서울 올림픽 조직위 통역안내과장/수석통역사
1988.02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 가입(한국인 1호)
1989.011990. 11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홍보실장
1990.111993. 5 대통령 공보 비서관(3급)겸 통역관
1993.051993. 12 종합유선방송위 관리국장
1994.011999. 2 YTN 국제부장/위성통역 팀장
1999.03외대 통역대학원 전임교수 임용
1999.08 ~ 2001.07외대 통역연구소장
2000.10서울 ASEM Ⅲ 정상회담 통역조정관
2001.01CSTV Korea CNN 동시통역조정관
2001.08한국외대 BK21 특화사업단 통역번역센터 소장
2001.09월드컵 조직위원회 통역자문위원
2002.05~06월드컵미디어센터 통역담당관
2002.11제2차 외교통상부 민주공동체 서울회의 통역 및 조정
2003.01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위원회 자문위원
2003.05법무부 세계 반 부패회의 통역 조정관
2003.08대구 유니버시아드 통역 자문 및 통역
2004.05세계여성지도자회의(GSW) 통역 총괄
2004.09대검찰청 제9차 세계검사협회(IAP) 연례총회 통역 총괄
2004.09외교통상부 UNDP Good Governance 회의 통역 총괄
2004.10삼성전자 상해 글로벌 로드쇼 통역 총괄
2005.05행정자치부 정부혁신세계포럼 통역 총괄
2006.0213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장 보임
2006.05국제통번역대학원협회(CIUTI) 서울 총회 주관
2006.08한국외대 외국어사업본부 통번역원 원장 보임(겸임)
2006.10제16차 세계빌딩관리 연맹 서울대회 동시통역 담당
2006.12제15회 도하 아시안 게임 한영 통역사 10명 선발 파견
2006.05-2009.06세계통번역대학원협회(CIUTI) 이사
2007.12현재 (사)한국통번역사협회(KATI) 이사
2009.06보건복지인력개발원 의료통역사 양성 통역 책임교수
2010.11G-20 서울 정상회의 통역자문위원
2010.11광저우 아시안게임 기자회견 영어통역
2011.04대구 세계육상연맹(IAAF) 이사회 통역 총괄
2011.06 세계검사협회(IAP) 총회 및 검찰총장 정상회의(WS) 통역 담당
2011.08 대구 세계육상대회 기자회견 통역담당
2011.11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 통역자문위원
2012-2015 한국통번역사협회(KATI) 3대 회장
2014.02 한국외대 연수평가원장/평생교육원장
2014.08 한국외대 통번역센터장
2014.09 인천아시아 경기대회 MPC 기자회견 동시통역 담당
2017.08 세계번역가연맹(FIT) 이사 선임
2018.08 한국외대 정년 퇴임/통번역센터장 촉탁 1년 근무연장
2019.07 통번역대학원 40주년 기념행사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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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살의 그는 현재 명예교수. 6년 전까지 그는 현역 교수였다. 2006-2007년에는 통역대학원장이었다. 그 전에는 뭐였느냐고?
그는 출발이 역관(통역가)이었다. 1997년 육군 소위 통역장교의 신분으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영어 번역관으로 국방부에서 파견되어 1978년 6월말 중위로 소집 해제되었다. 경호실 정보처는 그의 전역을 만류했으나 25세의 약관이었던 그는 이를 뿌리치고 민간인 신분으로 현대건설 해외업무부에 취업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 달았고, 그로부터 얼마동안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경쟁력이 외국어 뿐임을 깨닫고 1979년 9월에 개원한 모교 한국외대의 ‘동시통역대학원’에 응시해 1기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가 걸은 길은 동시통역사, 올림피언(서울 올림픽 조직위 수석통역관 겸 통역안내과장(서기관급 별정직 공무원), 경제단체인(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의 홍보실장을 거쳐 청와대 대통령 통역 겸 공보비서관(부이사관급 별정직 공무원 공보관) 등이었다.
1993년 3월 김영삼의 문민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별정직 부이사관까지 이르지 못하고 종합유선방송위의 관리국장 직을 맡아 한국최초의 20개 유선방송을 선정하는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 관리국장(역시 서기관급 별정 행정직 공무원)을 거쳐 자신이 관리국장으로 선정하는데 관여한 한국 최초의 24뉴스 채널 YTN의 국제부 부장 대우로 입사해 공보관 아닌 기자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40세의 사내가 공보관에서 그 상대역인 언론의 부장급 기자로 탈바꿈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아주 드문 경우일 것이다.
전 KBS 기자들로 채워진 YTN에서 그는 놀라운 생존력을 보이며 1997년 국제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YTN에서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해 국내 방송 최초의 위성통역실을 만들어 24시간 뉴스 휠을 채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동안 그는 CNN 도쿄 지국과 CNN 뉴스 발췌권(excerpt-ing rights) 을 협상해 타결 지었고, 매년 봄 남불 도시 니스에서 열리는 국제 방송프로그램 시장(MIP-TV)에 가서 선진국의 뉴스 프로그램을 저렴하게 구입해 오기도 했다. 그런 업무는 기자가 아니라 방송 행정인으로 변신해 벌인 업적이었다.
1997년 밀부터 2001년 8월까지 지속된 IMF사태 와중에 그는 모교 통역대학원으로 스카우트돼 교수로 임용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99년 1학기부터 20열팔년 8월 1학기까지 20년 동안 후배 및 제자 양성은 그가 처음으로 5년 이상 한 직장에 붙박이로 있으면서 모든 정열을 바친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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