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씨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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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5-03-02 17:31 조회45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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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은 1933년 3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면(지금의 청송읍)에서 아버지 김영한(金永漢, 1905. 8. 7 ~ 1980. 7. 5)과 남양 홍씨 홍무경(洪戊庚, 1908. 9. 18 ~ 1997. 8. 9)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옥숙 영부인의 친오빠로 노태우가 그의 친구이자 매제이며, 금진호 전 상공부장관도 여동생 김정숙과 결혼해 그의 매제이다.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은 그의 고종사촌 동생이고, 노소영과 노재헌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종교는 불교다.
증조부 김광규(金光圭, 1845. 6. 21 ~ 1922. 5. 6)는 경상도 안동 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138위로 입격했다.
2.2. 군인 시절과 하나회[편집]
대구덕산국민학교,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서 행정학 학사 학위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육사 재학 시 성적도 가장 앞서면서 11기의 선두주자로 등극한다.육사 11기에서 156명 중 13등으로 소위 임관한 인물로 하나회에서는 드물게 공부를 잘하는 생도였다.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등과 하나회라는 군부 내의 사조직을 결성하였으나 육사 시절부터 위관 때까지만 해도 하나회의 같은 리더그룹이던 전두환과 중령 이상이 되면서 점차 선두를 다투는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김복동은 전두환과 멀어졌으며 또 기질적으로 달라 하나회 핵심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어 이후 "비하나회" 인사로 여겨진다.
이로부터 비롯된 전두환의 견제는 1972년 말 준장 진급 심사 대상에서 동기인 전두환과 손영길이 올라가는데 자신이 누락된 것에서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김복동은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강창성이 이를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국 전두환과 함께 준장에 진급한다. 이후 소장 진급 후에는 제5보병사단장을 지냈는데, 전두환과 같은 1차 진급자였었다.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재직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의 책임을 지고 대한민국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12.12 군사반란에는 반대하였으며 이후 1980년 7월 중장 진급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982년 1월 예편하였다. (노태우는 정무장관/내무장관 후 1983년 올림픽조직위원장 후 민정당 대표 후 1987년 대선 후보)
전두환의 눈 밖에 났음에도 매제 노태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이를 뒤집는 기사가 나왔다. 신동아에 연재되는 당시 정호용의 측근이었던 특전사 보안반장 김충립의 수기에 의하면 김복동과 불화를 겪은 것은 오히려 노태우였다는 것.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과 달리 후발주자격이었던 노태우가 쿠데타 이후 실세가 되면서 자신을 무시하자 술상을 뒤엎었다고 한다. 노태우는 그를 강제 예편시키려 했으나 정호용이 이를 중재하여 막아주었다고 한다.
2.3. 예편 이후 정치인 시절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구속되자 대타로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노태우의 친인척 배제 방침에 따라 뜻을 접었고, (계속)
((곽중철은 1989.01-1990. 11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홍보실장으로 근무하던 1990년 김복동 사장의 미국 정계 출장 수행 통역의 집요한 제의를 거절하고 따라가지 않았다. 그 때 인연을 맺었으면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알 수 없다. 그 후 나와 그의 행로는 다음과 같이 엇갈렸다.
1990.11-1993. 곽중철 5 대통령 공보 비서관(3급)겸 통역관
1992년 김복동 국회 입성
1993.05-1993. 12 곽중철 종합유선방송위 관리국장
1994.01-1999. 2 YTN 국제부장/위성통역 팀장
(1994년 3월1일 YTN개국)
1999.03 외대 통역대학원 전임교수 임용))
김복동은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으며, 결국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그 해 가을 고종사촌 동생 박철언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민자당 탈당 과정에서 매제(매부)인 노태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무작정 탈당계를 제출하는 바람에, 기자회견을 위하여 대구 지역구 사무실로 가던 도중 동대구 IC 톨게이트를 지나 호남정유 주유소 앞쪽에서 경찰 관용차에 강제로 모셔져서 서울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노태우가 직접 부른 건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해 강제로 끌고 오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는 납치로 알려져 떠들썩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실시간 연락이 어려웠고, 하필 손윗처남이 탈당한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노태우가 경찰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한편 탈당 과정에서 노태우의 친인척 중 가장 YS에 우호적이던 금진호는 자신의 보좌관을 시켜 탈당 번복 보도자료를 작성하게 한 다음 김복동 의원실의 여직원에게 각 언론사에 이를 보내도록 지시했고, 당연히 김복동의 보좌진은 탈당 번복 보도자료에 대하여 반발했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해 정주영 후보의 선거 운동을 적극 도왔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결국 3당 합당으로 인해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던 김영삼이었고, 이듬해 출범한 문민정부와 민자당이 통일국민당 의원들을 대거 빼가며 와해공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출범한 신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면서 신민당 대표 자격으로 자민련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 갑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곽중철이 YTN 국제부장이 된)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DJP연합에 참여해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으며,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 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으며 총선이 끝나고 불과 6일만인 2000년 4월 19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7세. 당시 곽중철은 모교 외대의 2년차 교수였다가 2006년 통역대학원장이 되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이 대구역에서 침산동, 경북대학교 북문, 복현동, 불로동, 봉무동에 이르는 노선이 아닌 현재의 동대구역 경유 안심행 노선이 된 것에는 동대구역의 수요 뿐만 아니라 동구 갑 출마를 준비하던 김복동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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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처가사랑과 황태자 박철언의 탄생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1988년 2월 25일 청와대로 노모 김태향(오른쪽 둘째)와 장모 홍무경(오른쪽 끝) 여사를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노태우는 편모 슬하에서 자란 효자며, 처가 사랑도 극진했다.
“우리는 노 대표를 후계자로 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대신 노 대표는 한 가지만 다짐해 줘야 한다.”
1987년 초 시내 모처에 모인 5공 실세들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불러 다짐을 받고자 했다.
노태우가 “뭐든지 말해 보라”고 하자 모임의 좌장이자 노태우의 절친 정호용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된 후 친인척 문제를 확실히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
당시 참석자는 정호용(육사 11기) 외에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육사 14기), 안무혁 국세청장(육사 14기),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육사17기) 등 군 출신 5공 핵심들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이후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역할을 해냈다.
정호용은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거치면서 내각과 군부를 관리했다. 이춘구는 선거대책본부장과 취임준비위원장으로 당을 맡았다.
안무혁은 안기부장이 돼 정국을 총괄했다. 김용갑은 청와대 수석으로 전두환 대통령 주변의 노태우 비토를 저지하는데 한몫했다.
이들이 연초부터 밀실에 모인 것은 나름의 책임의식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신군부 권력의 공동창업자’라 자부했다. ‘정권 재창출도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에 싸여 있었다. 이들은 노태우 도착 직전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의 비리를 성토하던 참이었다.
두 가지 면에서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친인척 문제에 취약했다.
첫째, 노태우의 성격이다. 전두환처럼 확고한 리더십도 친인척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노태우는 성격이 미적지근한데 친인척들은 성격이 강했다.
둘째, 전두환의 경우 친인척 비리가 대개 이권개입 수준이라면, 노태우의 경우 국정개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처남 김복동은 육사 11기 출신으로 정치참여는 물론 대권 꿈을 품고 있던 인물. 동서 금진호는 상공부 장관까지 지낸 엘리트 관료 출신. 처조카 박철언은 안기부장 특보이자 노태우의 핵심 참모로 이미 매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런 주변의 우려를 잘 알기에 노태우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약속한다. 내가 그 약속을 안 지키면 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좋다.” 참석자들이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친인척 중 김복동(처남)과 금진호(동서), 박철언(처사촌)을 철저히 관리해 달라. 나머지는 우리가 나서서라도 막겠다.”
전두환 못지않은 노태우의 처가 사랑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11월 21일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에 참석한 김옥숙 여사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튀지 않는 후보 부인' '보이지 않는 내조'를 강조해 온 노태우 선거캠프는 김옥숙을 군중 속에 묻혀 있는 모습으로 언론에 노출시켰다. 중앙포토
전두환의 처가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잘 알려졌다. 장인 이규동은 전두환이 육사 생도 시절 육사 교수부장으로 일찌감치 전두환을 후원해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전두환은 장군집 사위가 됐다.
노태우 역시 과분한 집으로 장가 갔다. 노태우는 대구 변두리 가난한 집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처가는 대구의 유복한 집안이었다. 장인이 일제시대부터 공직생활을 해 대구 시내에 집이 있었다. 이 집안의 3남 김복동이 육사 11기 하나회 창립멤버였다. 노태우는 김복동의 집을 제 집처럼 들락거렸다.
김복동의 여동생 김옥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김복동이 “노태우는 내가 보증한다”며 밀어준 덕분에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대신 노태우는 김복동이 당시 집안에서 꺼리던 지역(전남 광주) 출신인 임금주와의 결혼을 (아버지로부터) 허락받을 수 있게 지원해 주었다(노태우 회고록 참조).
김옥숙의 큰오빠는 교장 선생님이었고, 둘째 오빠는 경북대 총장을 지낸 의학박사다.
김옥숙 역시 지역 명문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경북대학을 중퇴한 재원이었다.
여동생 김정숙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상공부에서 잘나가던 금진호와 결혼했다. 노태우 입장에선 처가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8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