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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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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8-26 11:02 조회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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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8, 다음 임지가 미국 조지아주로 결정된 아서 보니파스 소령(당시 대위)은 귀국 준비중이었다. JSA 중대장 임기가 일주일 남은 8 18, 그는 유엔 초소 시야확보를 위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감독 중 트럭을 타고 몰려온 북한군 20여명과 맞닥뜨렸다. 북한군이 쇠몽둥이와 삽, 곡괭이 등을 들고 유엔군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북한군 여러 명이 휘두른 도끼에 보니파스가 쓰러졌다. 현장에 있다 가까스로 북한군 공격을 피한 한국군 김문환 대위는 휘하 병사와 함께 보니파스를 지프차에 태웠다. 가늘게 뛰고 있던 보니파스의 맥박은 의무실에 도착했을 때 멈춰 있었다. 마크 배럿 대위(당시 중위)도 북한군에 구타당해 숨졌다. 이 사건의 여파로 6·25 정전 후 처음으로 데프콘3(준전시)가 발령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가까스로 일단락됐다. 젊은 미군 장교 두 명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19768 18일 서울은 JSA 보다 더웠으리라. 그 해 초 2월말 소위로 임관한 ROTC 14기 나 곽중철 소위는 3월초부터 6월말까지 6개월 김해 공병학교에서 초군장교 훈련을 받고 경기도 성남소재 육군종합행정학교 어학처에서 장교와 사병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실무부대에서 초급장교로 뺑뺑이를 도는데 그야말로 나이롱 보직을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동안 나에게 닥쳐올 인사바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나는 모교가 있는 동대문구 이문동의 하숙집에서 성남까지 군용 통근버스로 출퇴근하는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행정학교 근무 석달 만이고 판문점 사건이 난지 한달 만인 19769월 몇 일이었던가, 행정학교장 사무실 앞에 짚차가 한대 멈춰 섰고, 어학처장의 명령을 받은 초급장교 영어담당 소위 4명을 태운 차는 어디론가를 향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짚차는 서을 시내를 관통해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어리버리한 촌놈 소위 4명은 3층 건물의 카펫이 깔린 3층 방으로 안내되었고, 알고 보니 그곳은 경호실장실의 부속실이었다. 바로 옆 경호실장실의 정면에는 권총으로 무장한 해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잠시 후 10년 연배 쯤으로 보이는 민간인이 우리를 앉히고 각각 다른 영어 주간지를 한 권씩 주면서 사설을 번역해 내라고 했다.

타임, 뉴스위크 등 잡지 중에서 나는 US NEWS & WORLD REPORT를 마주했고, 주제는 4명 공히 한달 전 일어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었다.

그런데 경호실의 번역사 선발 작업은 어찌된 일인지 76년 가을이 다 가도록 성사되지 않았고, 3개월 후인 77년 들어서야 진행이 재개돼 1 17일 드디어 나는 장교 동정복을 입고 청와대로 출근했다. 거기서 동기인 외대 일어과 출신 정ㅎㅊ 소위와 해후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됐지만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나의 짧은 군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눈치를 보니 국가안보를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 앞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은 해외의 반응이 궁금했고, 주요 해외언론의 반응을 중앙정보부(안기부에서 현 국정원) 보고 보다 더 일찍 입수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내가 뽑히고, 일본 언론을 번역할 외대동기생이 나와 함께 경호실 정보처 존안계에 국방부 요원으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각각 일/영어 선배 한분씩을 모시고 월요일부터 토요일 정오까지 하루 안빠지고 번역을 했다. 하루 종일 번역한 영/일어 기사를 선배들이 감수를 하고 타자를 쳐서 경호실장실에 올리면 실장은 제본된 번역본을 다음날 출근 길 차 안에서 읽고 대통령과 참모들과의 대화에 활용한다는 흐름이었다. “차실장은 유식하다는 말이 나오게 돼있었다.

효자동 경복궁 뒷문 청와대 30경비단(훗날 12/12의 사령부)의 장교숙소(BOQ)에 머물면서 민간인처럼 머리를 길러 곤색 양복을 입고 주말이면 광화문과 종로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동안 경호실에서는 전두환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작전차장보 자리를 동기인 노태우 소장에게 물려주는 걸 목격했고, 매주 토요일 경복궁 30경비단 연병장에서 열린 국기하강식에서 지휘봉을 들고 폼을 잡는 차지철 실장을 바라보며 10/26의 전조를 언뜻언뜻 느끼기도 했다.  

경호실의 번역작업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근무 1년이 가까워 오던 1977년 말 나는 군 의무 복무기간이 끝나는 78 6월말 청와대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새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벼운 처세를 꾸짖으면서.

1976 6월말 청와대를 나온 나는 삼성도, 럭키도 아닌 현대건설을 선택했고 돈도, 권력도 없는 말단사원 생활에 회의를 느낀 나는 1979 9월 설립된 모교 외대의 동시통역대학원 1기로 입학해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용기였던지 반항이었던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음은 동 사건의 세부상황과 언론의 보도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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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 미 주간지 US NEWS & WORLD REPORT의 관련사설. "사건은 공산주의 식의 사전 계획된 범행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됨.

1976 8 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Panmunjom Axe Murder Incident) 직후, 미국의 시사 주간지 《US News & World Report》는 사설을 통해 공산주의 정권의 우발적 위협이 아닌 계획된 도발 성격을 강력히 비판했다. 

언급하신 사설의 핵심 요지와 당시 반응은 다음과 같다.

 

주요 사설 요지 및 맥락

계획된 범행 지적:

사설은 "사건은 공산주의 식의 사전 계획된 범행이었다(The attack was a premeditated, communist-style crime)"는 명확한 규정으로 시작하여, 북한군이 트럭에 쇠몽둥이 등 무기를 미리 준비해 접근한 점과 전방위적인 압박 구도를 볼 때 우발적 충돌이 아닌 철저히 의도된 도발이었음을 강조했다. 

도발의 목적 분석:

당시 주한미군의 철수를 유도하고 한반도 내 긴장 상태를 극대화하여 내부 체제 결속 및 대외 협상력을 높이려는 북한 김일성 정권의 전형적인 '위기 조성 전술(Brinkmanship)'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및 유엔군의 강경 대응 촉구:

공산주의 세력의 유화책이나 침묵은 더 큰 도발을 부른다고 지적하며, 미국 정부가 단호하고 유화적이지 않은 단호한 군사적·외교적 대응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 발생 (1976 8 18): JSA 내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보니파스 대위, 베렛 중위)이 북한군의 도끼 및 흉기 공격으로 살해당함. 

미국의 대응 (폴 버니언 작전): 미국은 즉시 데프콘 3를 발령하고, 미루나무를 전격 절단하는 '폴 버년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강행하여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펼침. 

결과: 북한 김일성은 이례적으로 유감 뜻을 담은 친필 서한을 전달하며 한발 물러섰고, 이후 판문점 JSA 내 분리 경비 제도가 도입됨. 

이 사설은 당시 서구 언론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단순한 지역적 경비병 간의 다툼이 아니라, 공산권의 전형적이고 계산된 군사 도발로 인식했음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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