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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필요성-한국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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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4-01-07 00:00 조회3,8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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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講義를 못 알아듣는 대학생

李應百 <서울大 명예교수>

대학 졸업생들에게 기업체에서 이력서를 써 내라고 했더니,
소정란에 필요한 내용을 제대로 적어낸 예가 거의 없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력서도 하나 반반히 못 쓰는 대학 졸업생, 기가 막힌 일이다.

그 전에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이력서는 한자로 글씨도 깨끗하게 잘 썼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현상이 언제부터 일어났는가.

정부에서 1970년 이래 한글 전용교육 정책 실시가 가져온 결과다.

느닷없는 한글 전용 교과서로 가장 당황한 것은 국어과 교사들이었다.

당시 고3 국어1학기 첫 과가 독립선언서인데,
그 첫머리가 그 때까지는 국한혼용으로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뜻파악이 분명히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순한글로 바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 했으니, 오등이 그렇다면 육등은 어찌하란 말인가.

자는 또 아는 무슨 말인가.

이렇게 쓸데없이 제기되는 의문의 해명으로 진도가 제대로
 나갈 수가 없게 되자,서울에서는 청계천의 헌 책점에 나가
 한자가 섞인 헌 교과서를 사 오게 해서혼란을 면하게 하였다.

국어 교단에 비등한 이런 여론을 인식한 당시의 문교부는 1
 972년에 제정한 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천 8백자에서
 중학 국어에 중학교용 9백자, 고등 국어에 고교용 9백자를
 괄호 속에 넣어 개편하여 1975년 새학기부터 사용하였다.

당시 서울대 입시 국어문제에는 한자를 괄호를 벗겨 노출시키고,
한자어의 뜻묻기와 쓰기 등을 필요에 따라 내었다.

그리하여 중고 국어에서 한자를 열심히 가르치고 학기시험에서
 평가하여, 당시 서울대 신입생은 한자가 새까맣게 섞인
 국어학 개론이나 또 국문학 개론 교재를 막힘 없이 줄줄
 읽어내려 갔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입시가 정부에 의해 주관된 이후로 차차 한자 출제가
 줄어들더니, 지금은 대학수학능력고사에 한자가 한 문제도
 나오지 않아 중고 국어학기시험에서도 한자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괄호 속 한자에 대해 학생이 국어과 교사에게 질문하면
 한문 선생님께 여쭈어 보라는 책임전가 현상이 일어나는 풍조이고 보면,
대학 졸업생이 이력서를 제대로 못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우리말은 70퍼센트가 한자어다.

어소(語素)인 한자의 훈과 음을 알아야 뜻을 분명히 알게 되는데,
한자어를 음으로만 익혀 분명한 뜻을 모르고 짐작으로 넘겨짚는 현상이 벌어졌다.

학술어의 대부분이 한자어인데,그 정확한 뜻을 모르니 교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올 리 없지 않겠는가.

강의를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80년대의 한자 섞인 논문이나 서적은 물론,심지어 책의 제목도 못 읽는 처지에서 우리의 대학 교육은 헛돌고 있다.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철학과 학문으로 세계를 주름잡았던 독일이 전후(戰後)평준화 정책으로
 교육의 질이 바닥에 떨어지고,유수한 학자가 배출되지 못하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

한자 학습의 최적기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기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 일본에서의 실험을 통해 이미 입증됐다.

초등학교 국어에 한자 1천자 정도를 노출 혼용해 가르치면,
기초가 든든히 잡히게 될 것이다.

동성동본혼의 금지 전통으로 머리가 소명(昭明)한 우리네 2세
 국민들은 한자를 소화해 낼 바탕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글자를 분명히 가르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에게 공손히 하며, 양심에 따라 충실하고, 사람 사이에 신용이
 있어 사람다운 사람의 바탕이 이룩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문자는 학습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신문이나 잡지, 서적 등 인쇄물과
 간판의 상호나 도로 표지 등에 필요한 한자를 넣어 자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자연스레 학습이 되어, 문자생활도 빠른 시간에 뜻 파악이
 분명히 되는 능률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대학생이 교수의 강의를 못 알아듣고, 대학 졸업생이
 이력서를 못쓰는 기현상이 없어지고, 인격이 닦이고 지적이며
 창의적인 문자생활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200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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