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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007 CIUTI 총회를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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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5-31 22:48 조회4,81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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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세계통번역학교협회(CIUTI) 총회가 열려 다녀왔다. 지난 해에는 우리 외대통대가 주최해 서울에서 열렸고, 이번에는 다시 협회 본부가 있는 유럽으로 복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이 이태리의 로마도 아닌 볼로냐(공항)에서 다시 기차로 30분 거리의 Forli 라는
 작은 마을에서 다시 승용차로 10분을 올라가는 산 위의 Bertinoro(금잔으로 마시다의 뜻)라는 회의 전용시설이었다. 수도원을 개조해 만든 회의 및 숙식 시설이다.   
몇 달 전 총회 장소를 통보받았을 때 난감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 내 성격에 전혀 맞지않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작년 서울 총회에서 이사회 이사로 선임된 몸이었고, 이미 연초에 제네바에서 열린 이사회에 가지않은 전과가 있어 마지막 순간 가기로 결심했다.
최근 체력에도 문제가 있어 학교에서 나온 여비에 자비를 보태 에어프랑스의 비지니스 클래스를 예약했다. 10시간 넘는 비행은 절대 이코노미를 탈 수 없다는 것이 내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벌써 힘들어져 다음에 계속 써야겠다.... To be continued.... 



 

 
 
 

곽중철 (2007-06-01 11:13:38)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던 중 파리 ISIT 통번역대학원장 마리 모리오-브리슈 교수와 만났다. 통번역이 아닌 사학 전공인데 똑똑하고 착한 여성이다. 나와 이두선 전 원장이 처음 참석했던 2005년 파리 CIUTI 총회를 ESIT와 공동주최했고, 2006년 서울 총회에 왔었기에 구면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이태리 공항노조가 파업 중이라 비행기에 앉아 대기하다 3시간 늦게 볼로냐 공항에 도착하니 다행히 볼로냐 대학 통번역대학장이자 이번 총회의 주최자인 라파엘 미랄레스 교수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도 서울 총회에 왔었기에 구면이었고, 스페인 출신으로 이태리 여성과 결혼해 이태리어는 유창했지만 영어는 잘 못하는 스페인 문학 박사다. 그 덕분에 볼로냐에서 포를리까지 기차 여행 대신에 그의 차로 바로 베르티노로에 도착했다.
베르티노로는 언덕 꼭대기에 성(城)같은 건물에 있는 숙소와 그 밑에 2-3개의 별채가 있었다. 나는 이사 자격으로 꼭대기 숙소 3층 조그만 독방에 투숙했다. 옛날에는 추기경 등 성직자들이 기거했던 장소란다. 창밖으로는 산 밑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곽중철 (2007-06-01 11:35:57) 
 
같이 차를 타고온 체코 프라하 대학 대표 여교수 등 3명과 함께 베르티노로 마을로 걸어내려가 전망이 좋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식당에 아침을 먹으러가니 CIUTI 이사진, 즉 회장, 사무총장. 부회장들이 날 반겼다. 연초에 열린 이사회에 불참한 것이 역시 마음에 꺼리켰다. 오전, 오후 두 차례 이사회를 해 내일부터의 총회 일정과 토의 내용을 사전 조율했다.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된 총회에는 약 45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말의 향연이 시작됐다. 공식언어인 영/불/독어로 동시통역을 한 4명의 독일 통역사 중 3명은 서울에도 왔던 여성들이었다.
CIUTI는 회장단이 독어권이라 독어가 강세다. 독어가 나오면 영어통역을 들어야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이웃에 사는 유럽대표들도 3개언어를 모두 통역없이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이번 총회의 백미는 CIUTI Profile, 즉 통번역학교협회의 사명이라는 문건을 채택한 것이다. CIUTI가 태동한 지 40년이 넘어 통번역학교가 어떤 일과 역할을 해야하는 지를 정한 것인데 역시 3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곽중철 (2007-06-02 10:02:25) 
 
일종의 헌장같은 이 문건의 내용 중 특이한 것은 통번역 실무 교육을 뒷받침할 통번역학 이론 연구의 중요성과 이를 실무교육에 반영할 필요성을 밝힌 것이다. 즉 통번역 교강사가 모두 이론으로 무장하고 이를 실무교육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한다는 점이다. 이 문건이 영불독, 3개언어로 번역되어 곧 세상에 공표될 것이다. 3개언어로 번역되고나서 다시 번역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일단 번역되고 나면 이의를 달 수 없도록 단서를 달기도 했다. 
 
 
 

곽중철 (2007-06-02 10:09:34) 
 
역대 총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AIIC, EU, 유럽의회 등의 통번역 담당관이 출장 와서 소속기관의 통번역 현황을 보고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예를 들어 유럽의회의 담당관은 현재 의회의 실무언어가 23개에 달하며 약 100명의 계약직 통역사와 100명의 프리랜스 통역사가 일하고 있으며 23개 언어를 최소 숫자의 부스에서 통역하기 위해 통역사 1인당 3-4개의 실무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인터넷의 발달로 각국에서 회의 현황을 동시통역으로 듣고 있기 때문에 통역에 더 신경을 쓴다는 점도 보고되었다. AIIC와 EU는 각 통역학교와 통역사 지망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소개하였다. 
 
 
 

곽중철 (2007-06-02 10:22:06) 
 
25일 오후에는 Bertinoro 시와 볼로냐 대학이 주최한 개회식이 있어 지루한 축사가 이어졌고, 25일 저녁에는 Forli의 여시장이 Forli 미술관에서 리셉션을 주최했다. 이태리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의 초상도 보았다. 26일 토요일 아침 총회의 나머지 일정을 마치고 근교로 관광을 나가 여러 교회에서 모자이크 예술을 감상한 후 Forli 시내의 유명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고급 이태리 음식을 저녁으로 먹고 수도원 숙소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극동에서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온 나는 다음 날 새벽에 볼로냐 공항으로 떠나야하기에 걱정이 되었으나 택시를 불러주겠다던 라파엘 교수가 마음을 바꿔 자기 아침 7시 자기 차로 1시간을 달려 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8시에 그와 헤어지면서 포옹하며 감사했더니 'We are friends."라고 했다. 볼로냐에서 파리 공항에 도착해 서울 행 에어프랑스를 탔다. 볼로냐 공항에서 분명히 우측 창쪽 좌석을 달라고 해 확인을 받았는데 타보니 중간 3좌석의 중간, 가장 불편한 자리였다. 항의했더니 볼로냐 공항 직원이 비행기 기종을 착각했을 거라나? 에라 모르겠다, 비지니스 석을 완전히 눞혀 잠이나 자자, 낮은 베개 높이 베고.... 
 
 
 

곽중철 (2007-06-02 10:25:50) 
 
EU처럼 회원 간의 이해가 상충하는 CIUTI 내부의 갈등, 회장단과 이사회의 횡포, 유럽 위주의 조직에서 유일한 아시아인(황인종)으로 느끼는 소외감 등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땅에 묻는다. 
 
 
 

곽중철 (2007-06-10 21:07:46) 
 
지난 5월말 이태리에서 열린 2007 세계통역학교협회(CIUTI) 총회는 2005년 파리, 2006년 서울에 이어 필자가 세번째로 참석한 회의였다. 이 총회에 참석하는 유럽 위주의 30여개 통역학교를 대표하는 대학원장 혹은 학장 40여명은 평균 연령 50세 가량으로 통역보다는 전문 번역사로 활동하다가 번역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하게 된 이가 대부분이다. 이번에 3-4일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유럽도 아닌 극동에서 태어난 필자가 왜 통역을 전공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서로 국경이 붙어있는 유럽인들, 특히 CIUTI의 통번역 전공자들도 CIUTI의 공식실무언어인 영/불/독어를 통역없이 다 알아듣는 이가 반을 넘지 못한다. 내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와 영어와 불어를 통역없이 알아듣는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내가 여기서 태어났으면 5개국어 정도는 쉽게 했을 거고, 통역 공부가 그렇게 힘들 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난 왜 우리나라에서 통역을 전공하고, 통역사가 되었을까? 
 
 
 

곽중철 (2007-06-11 10:24:05) 
 
유럽의 통번역사들을 보면 태생과 성장환경이 특이한 경우가 많다. 우선 <태생 시 작은 사고(by a small accident of birth)> 라는 조크가 있듯 국적이 서로 다른 부모를 가진 경우다. 예를 들어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를 둔 경우 두 언어를 모두 모국어로 할 수 있게 되고, 그 부모가 제3국에 거주할 경우 제3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이미 trilingual이 된다. 제4국으로 이주하면 quadralingual이 되고....
그런데 필자는 우리나라의 시골인 대구에서 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고교 졸업 때까지 외국인과 대화 한 번 못해 보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통역사가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타고난 <말재주>와 <말>을 중요시하는 가정 분위기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내 부모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식들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감시>하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 과목은 언제나 전교 1등이었단다. 내가 <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것이 못 마땅한 아내는 <고려시대 한국으로 온 곽 씨의 시조가 통역관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어쨌든 나는 성장하면서 국어, 영어, 불어 등의 과목이 좋았고, 구 과목들에서는 항상 톱클래스의 성적을 받았다. 또 일곱살 위인 형이 동생인 나의 영어실력을 높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했다. 3형제 중 가장 영어를 못했던 내 동생이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 지금은 미국 본사에서 간부로 살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다.
나는 고3 시절 대학 입시가 전과목 출제로 바뀌지 않았으면 1차대학에 거뜬히 합격했을 것이다. 전과목 출제로 1차대학에 떨어진 후 입시제도를 원망하면서 재주를 포기하고 2차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것도 필연이었을 지 모른다.
대학에서 난생 처음으로 미국인 교수의 회화 강의를 듣고, 사투리 억양 투성이의 영어를 교정해 가면서 회의감도 들고 힘들었지만 어쩐지 영어는 남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이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영장을 받고 ROTC를 하기로 결심 한 후 나는 진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사회에 나가 인간 구실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다가 대학 4학년 때 맡은 영어 연극의 주연 역할은 영어 발음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하는 대사, 상대 역할이 하는 대사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외우고 원어민 발음을 흉내낸 것이었다.
 . 
 
 
 

곽중철 (2007-06-11 10:36:31) 
 
입대를 앞두고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하고, 4개월 장교 훈련을 마치고 육군행정학교에서 6개월 영어교관을 한 후 청와대 경호실의 번역 요원으로 차출된 것도 <통역사>가 되는 필연적 과정의 일부였다. 국가가 날 통역사로 키운 것이다.
그러나 외대 통대의 1기 입학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통역 공부는 날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선배>나 <멘토>가 없이 하는 통역공부는 그야말로 <암중모색>이었다. 모국어 없이 영/불어 통역을 공부한 파리 유학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외국어와 통역에 대한 한없는 회의감을 들게 만든 <암흑의 시절>이었다. 귀국해 프리랜스, 올림픽 통역, 대통령 통역, TV 통역을 거치면서도 내가 모교에서 후배 통역사들을 가르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통번역 공부를 2년 만에 마치기는 힘들다. 나는 4년을 죽자고 공부했다. 그러나 여기 통대에서 2년 만에 졸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보다 먼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통역 공부하는 지름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통역이 말 자체보다는 주변 지식이 중요하다"고 딱 부러지게 조언해준 선배도 없었다. 여러분은 선배들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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