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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료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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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6-28 10:07 조회3,7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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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9월 설립되어 전문통역사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의 졸업생들이 소속된 통번역원은 지난 3월 부로 하루 6시간 통역료를 80만원으로 인상해 받기 시작했다. 필자가 동 대학원의 1기로 졸업했던 1983년 당시 통역료가 하루 20만원이었으니 약 25년 만에 4배로 오른 것이다. 이 통역료는 다른 물가에 비해 과연 비싼 것일까? 일본의 공식 통역료는 10만엔(약 100만원)이고 중국에서는 유엔 관련 기관과 비슷한 500미불(약 50만원)이지만 통역사를 소개하는 용역기관을 통하면 가격이 훌쩍 뛴다고 한다.

처음으로 전문 통역 서비스를 의뢰하는 고객 중 일부는 “통역료가 비싸다”고 놀란다. 6시간에 80만원이면 1시간에 13만원 정도인데 과연 이것이 비싼 것일까? 통역사는 부가가치가 발생하지 않는 통역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1년에 기껏해야 1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데 반해 현대 사회에는 변호사, 의사, 컨설턴트 등 단위 시간당 훨씬 많은 보수를 받아 연봉이 수억 원인 전문직종이 수두룩하다. 한 번이라도 전문 통역사를 고용해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은 통역료가 결코 비싼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통역이 얼마나 고도의 정신 노동인 줄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고객 중 일부는 실력이 없는 ‘가짜’ 통역사를 잘못 고용해 행사를 그르친 경험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통역료에 이의를 달지 않고 전문 통역사를 기꺼이 고용한다. 몇 10만원 아끼려다 몇 백만, 몇 천만 원이 든 행사를 망칠 수 있다는 자각 덕분이다.         

통역사는 보통 언어에 재능을 타고 나 4년제 대학을 마치고 다시 2년의 통역대학원 과정을 마친 사람이 대부분이다. 대학원 2년 동안 그들은 아주 독특하고 어려운 체험을 한다. 우선 모국어인 우리 말이 어렵다는 것과 통역이 ‘말 바꿈’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해야 하는 통역은 우선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다. 보통 일상에서는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한 후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정상인데 통역사는 남의 말을 똑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해야 한다. 더군다나 통역 부스에 들어가 동시 통역을 할 때는 남의 말을 듣는 동시에 다른 말로 그 의미를 전하는 인간으로서는 비정상적인 이중작업(dual task)을 해야 한다.

대학원에서 2년 동안 그런 비정상적인 작업 훈련을 받으면서 학생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통역이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나는 왜 통역을 공부하게 됐을까?... 그러다가 차츰 그들은 통역을 하려면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연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통역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말’보다는 ‘내용’을 공부하게 된다. ‘내용’을 이해하면 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통역사가 되기 위해 엄청나게 어려운 공부와 훈련을 해야 자격이 주어지고, 된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통역이라는 직종의 속성은 500년, 아니 통역이 처음 생겼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또 ‘역관’이라고 불리던 조금은 비하적인 대우도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불이 나면 119를 돌려 급히 찾고, 불이 꺼진 직후 감사의 인사를 받지만 이튿날에는 잊혀지는 소방수와 같은 직종, 부러움을 사기는 하지만 결코 존경은 받지 못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통역사는 이제 연봉이 훨씬 많은 전문직이 수두룩한 현대 사회에서 매일 뭔가를 배우는 재미에 <천직>이라는 소명에 산다. 우리나라 ‘진짜’ 전문 통역사들의 통역료는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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