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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국제스카웃총회 통역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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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07-21 17:19 조회3,4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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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서귀포 제주 국제컨번션센터(ICC)에서 열린 38th International Scouts Conference 동시통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몇 달전 제네바의 한 통역사로부터 이 회의의 영어 통역을 맡겠느냐는 이메일을 받고 무심코 그러겠다고 답한 것이 성사되어 제자 통역사 1명과 함께 갔다왔는데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행사였습니다. 이제 그 행사 통역을 하면서 느낀 점들을 시간 나는 대로 써보려합니다.   



 

 
 
 

곽중철 (2008-07-22 15:27:42) 
 
일주일 꼬박, 닷새를 통역해보기는 정말 오랫만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장소에서... 난 1999년 학교에 임용된 지 넉달만에 통번역센터 소장을 8년간 맡으면서 센터로 들어온 통역은 일체 맡지 않았습니다. 15년동안 조직 생활을 하면서 회의통역은 많이 하지 못했던 까닭도 있지만 후배들과의 <밥그릇 싸움>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8년동안 <소장이 잇속을 챙긴다>는 말을 듣지 않고 센터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1989년 한국의 첫 AIIC 정회원이 된 후 1년에 몇번씩 AIIC 명부를 보고 나를 찾는 해외의 통역의뢰를 받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매인 몸이라 사양하는 일이 많고, 또 규정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면 거절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요. 무리하게 용돈을 버는 것보다 편하게 살기를 택했습니다. 또 후배나 제자들을 소개해 주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네바에 사는 이란 출신 나나즈라는 66세의 할머니 통역사가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한국에서 스카웃 총회가 열리는데 한국스카웃연맹의 단골 통역을 <못믿겠다>하고 파리의 어느 통역사로부터 날 소개받았답니다. 해외의 통역의뢰는 취소되는 경우가 더 많아 이번에도 큰 기대는 않았는데 정말 성사가 된 겁니다. 13일 김포에서 제주로 비행하면서도 덤덤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통역하면서 정말 즐겁고 만족스런 경험을 많이 했답니다. 
 
 
 

곽중철 (2008-07-22 15:36:59) 
 
우선 서귀포 중문단지에 도착해보니 지정된 숙소가 신라호텔 바로 왼쪽의 5성호텔(스위트)이어서 기분이 좋았고, 새로 지은 제주 컨벤션센터 통시통역시설에서 만난 나나즈 할머니의 프로 정신에 매료됐습니다. 그녀는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이나 고 셀레스코비치 ESIT 교수와 꼭닮은 외모에 66세라는 나이와 상관없이 첫날 밤 열린 싱가폴 대표단 주최 가든파티에서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노익장이었습니다. 불어부스에서 베트남 출신 남자통역사(Lam)와 똑같이 통역을 하면서도 연설문을 챙겨 각 부스에 넣어주는 코디네이션을 완벽히 해냈습니다. 정열의 화신이었습니다. 
 
 
 

곽중철 (2008-07-22 15:57:30) 
 
월요일부터 통역을 시작해보니 스카웃이란 조직도 IOC나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100년의 역사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수업시간에 제자들에게 <어느 단체나 역사가 길수록 통역준비 시간도 길어진다. 수십년의 역사를 며칠 공부해 통역하기는 어렵다>고 말한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다국어 국제회의가 열릴 때 한국 통역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참석자들의 한국어 연설을 영어로 명료하고 정확하게 통역해 다른 외국어로 쉽게 통역되도록 하는 임무이고, 이를 불어로 retour라고 합니다. 둘째날 저녁 공식 개회식에는 우리 한승수 총리와 강영중 한국스카웃 총재 및 김태환 제주도 지사의 한국어 연설이 약 3시간 전에 부스에 전달되었습니다. 총재와 지사의 연설은 짧고 내용이 없어 같이 간 제자에게 맡기도 약 10분 길이의 총리 연설은 내가 sight translation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통역이 이번 행사 통역의 핵심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총리의 연설은 대부분의 한국어 연설이 그렇듯 핵심을 찌르기보다는 만연체의 늘어지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수식어를 빼고 핵심 메시지만 잡아 미친 듯 간이 번역을 한 후 통역을 시작했는데 총리는 너무나 빨리 연설을 읽어 내려 따라가기 바빴지만 <메시지만 전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개회식에 끝난 후 제네바 통역사들이 <한국어 연설 통역이 메시지가 명료해 retour하기가 정말 좋았다. 감사한다>고 했을 때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답니다. 앞으로 통역은 그보다는 부담이 훨씬 적을 줄도 예감했지요... 
 
 
 

곽중철 (2008-07-22 16:06:02) 
 
하루하루 통역을 해나가며 느낀 것은 simultaneous with text 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회의 시간은 제한돼있고, 발언자는 많으니 한정된 시간에 급속으로 연설문을 읽는 연사가 대부분이라 통역을 제대로 하려면 텍스트를 사전에 받아 예습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연설문을 보고 사이트로 통역하면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아니냐고 할 지 모르지만 100년의 역사가 담긴 연설문을 몇 분 전에 받아 숙지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특히 그 연설에 대한 질의응답을 할 때는 연설 내용을 숙지하지 않고서는 통역할 수가 없지요.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오는 학기부터 순차 문장구역과 텍스트있는 동시통역 연습을 더 많이 강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래서 <현장경험이 중요하다>는 거겠지요. 
 
 
 

곽중철 (2008-07-22 16:15:12) 
 
한 이틀 통역하다보니 서먹서먹했던 제네바의 통역사들이 좋아지기 시작해 나는 이들을 위한 주최국 통역사의 주인노릇을 해주어야함도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나즈에게 <내가 하루 저녁 한국 횟집에서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10명의 외국 통역사들을 중문 롯데호텔 옆의 신성타운으로 데려가 회정식을 제공했더니 맛있다고 너무나들 좋아했습니다. 그들에게 멍게, 해삼, 전복은 신기했고, 광어회는 황송했으며 마지막에 나온 서더리탕은 왜 한국의 술꾼들이 해장국을 좋아하는지를 체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40여만원을 쓴 이 저녁은 그들을 한국의 팬으로 만드는데 충분했습니다. 
 
 
 

곽중철 (2008-07-22 16:22:45) 
 
화요일 개회식을 마치고 공동 부페 만찬을 끝낸 후 예정에 없이 10시반까지 다시 회의를 했는데 나나즈는 사무국과 담판해 하루치 통역료를 더 받기로 해 우리를 위로했습니다. 다음 날은 오전에 약 한시간만 통역하고 휴회했는데 그날 통역료는 다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것이 <전문직>의 특권이었습니다. 통역이 없는 오후 우리는 호텔 수영장에서, 중문 해수욕장에서, 일부는 제주도 관광으로 망중한을 보냈습니다. 통역이란 참 좋은 직업이었습니다. 
 
 
 

곽중철 (2008-07-22 16:33:44) 
 
마지막날 호텔로비에서 나나즈를 비롯한 할머니 통역사들과 프렌치 키스(bisou)로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나는 서울로 돌아가기가 싫었습니다. 영원히 제주도에 남아 통역만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스카웃 총회가 다시 열릴려면 몇 십년을 더 기다려야할 텐데... 나나즈 뿐 아니라 영어부스의 Sou와 Eleanore, 스페인어의 Marie Claire와 Liliana, 아랍어 부스의 Ahmed(비엔나) 및 Dali(튜니스) 할아버지, 러시아어의 미남 블라디슬랍과 안드레(베를린 거주)를 나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그 지루한 한국어 통역을 함께한 어린 제자도... 나나즈는 자신보다 약 40세 젊은 이 제자를 겪은 후 "She is adorable" 이라고 감탄했답니다. 
 
 
 

곽중철 (2008-07-23 16:15:59) 
 
이번 제주총회에서 스카웃의 최고집행기관인 이사회(Committee)에 한국인 이사가 최고 득표로 선출됐는데 바로 삼성중공업 간부로 내년 은퇴를 앞둔 이항복(Simon Lee)씨였습니다. 나와 뱀띠 동갑인 그는 각각 삼성엔지니어링과 주한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두 딸을 데려와 자원봉사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맏딸인 로빈은 오랜 해외 생활로 원어민같이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는데 주최측 공지사항을 영어로 너무 빨리 발음해 나나즈 할머니의 주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곽중철 (2008-07-24 09:43:38) 
 
제네바 퉁역사들에게 저녁을 사면서 소맥 폭탄주 시범을 보인 일을 뺐네요. 회정식과 함께 맥주와 소주를 권했는데 모두들 거나해지자 내가 소맥 폭탄주를 만들어 단숨에 마셨더니 분위기가 더 올랐습니다. 불어의 램과 러시아어의 블라디슬랍은 따라 마셔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라와 언어는 달라도 사람은 다 통합니다. 호텔로 돌아와 다시 야외 풀사이드에서 그들이 사는 백포도주를 12시 남도록 마셨는데 다음 날 통역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곽중철 (2008-07-24 17:54:04) 
 
제38차 세계스카우트 총회 개회식
 한승수 총리 축사
2008-07-14

존경하는 ‘필립 다 코스타(Philippe Da Costa)’ 세계스카우트이사회 의장, 세계 각국의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
강영중 한국연맹 총재를 비롯한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세계스카우트연맹의 최대행사인 제38차 총회가 우리나라 제주에서 열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제주를 찾아주신 여러분에게 온 국민과 더불어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 총회는 세계스카우트운동의 지난 10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역사적인 대회라고 생각합니다.
1907년, 영국의 ‘베이든 포우엘’경이 20명의 소년들과 시작한 스카우트운동은 이제 전 세계 청소년 2,800만 명이 참여하는 지구촌 최대의 청소년운동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청소년들의 도전정신을 계발하고 리더십을 키우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또한 국제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의 증진에도 기여해왔습니다.
우리 한국도 세계 스카우트 발전에 적극 참여해왔습니다.
특히 1991년, 제 고향인 강원도의 고성에서 열린 세계잼버리는 우리나라 청소년운동에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청소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정과 화합의 축제를 펼쳤습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의 청소년운동을 이끌어온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의 뜨거운 열정과 노력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세계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
스카우트 운동은 지난 100년동안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는 더욱더 필요한 운동입니다.
저는 2001년 9월부터 1년간 제56차 유엔총회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와 인종, 종교, 문화를 초월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유엔총회의장으로 선출되기로 한 그날이 바로 2001년 9월 11일 이었습니다. 저는 테러의 공포 속에서 혼란한 시기에 유엔에서 국제테러근절에 앞장섰으며, 그러므로 더욱더 평화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세계화의 진전 속에 살아가야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실천해온 세계화 시대의 평화선구자들입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스카우트를 통해 국가간 교류협력과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제적 안목을 길러온 수많은 글로벌 리더들이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펼치는 다양한 사업들은 지구촌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100주년을 기념하여 추진하는 ‘Gift for Peace’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질병으로 고통 받고 끼니를 걱정하며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많은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카우트가 벌이는 갈등해소와 청소년 보호, 에이즈 퇴치를 비롯한 모든 활동은 더욱 확산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의 역량강화와 리더십 개발, 인권·복지 증진, 청소년의 건강한 환경조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존경하는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건국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당당한 민주주의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또한 국제사회와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도움에 보답하는 성숙한 세계국가를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세계와 호흡하면서 인류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스카우트운동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스카우트 지도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이곳 제주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 입니다. 또 특별자치도로서 역동적인 미래를 열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제주에 머무시는 동안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이번 총회를 축하하며,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곽중철 (2008-07-25 09:07:26) 
 
스카웃 회의의 공식언어도 올림픽처럼 영어와 불어지만 영어가 우선하는 게 다릅니다. 이번 총회에서는 두 언어 뿐 아니라 스페인, 러시아, 아랍어로도 통역이 제공됐고, 주최국의 한국어도 주최국 예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러시아 사용자들은 공개석상에서 발언을 자제해 러시아어 발언은 하나도 없었지만 스페인과 아랍어 발언은 가끔 있었습니다. 스카웃 운동이 영국에서 시작됐고, 현 집행부는 프랑스 인 위주라 영어와 불어가 거의 같은 비율로 나왔습니다. 제자는 채널을 영어로 고정시켜 놓고 영한 통역을 했지만 아무래도 시차가 나는 것을 보고 나는 불어도 그냥 받아 불한 통역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영/불어 사이에서 좀 헷갈렸지만 금방 영한을 하는지 불한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게 되더군요.
회의의 반이 불어로 진행되고, 밖에 나오면 유럽에서 온 통역사들과 불어로 소통하니 오랫만에 실컷 불어를 했습니다. 다 잊어 버린 것 같은 불어가 술술 나오는 것을 느끼고 파리에서 유학한 3년 시절이 새삼 기억났습니다. 
 
 
 

곽중철 (2008-07-27 09:24:52) 
 
수요일 밤 풀사이드에서 와인을 마시다보니 뉴욕에 사는 엘리노어가 과거 같이 일했던 어느 통역사를 비판하는가 했더니 우리보고 "통역사들은 누구나 이렇게 서로 흉을 본다"고 해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지요. 서울에서도 통역사들끼리 서로 흉을 보고, 누가 영어를 못한다느니, 누가 통역을 망쳤다느니 하지요. 듣다보면 사탄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런 상호 비판이 궁극적으로 한국의 통역 품질을 높여준다고 믿고 싶습니다.
다만, 통역을 하다보면 가끔씩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통역을 해낼까라는 자만에 빠지게 되지요. 어려운 통역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쉬운 것은 모두에 쉬운 것을.... 겸손한 통역사가 됩시다. 통역의 재능을 주신 하늘에 감사하면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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