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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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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12-25 17:24 조회3,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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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교수로 있는 내게도 실직의 경험과 반년이 넘도록 월급을 못 받은 과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1992년 말, 6 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말기에 청와대 공보비서관(부이사관 급)으로 있던 나에게 모교의 통역대학원 원장이 “임기가 끝나면 모교 교수로 오라”고 제의했다. 기존 교수진이 반대할 것이라는 나의 우려에 “내가 원장이니 반대를 물리치고 임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다른 비서관들이 후일을 도모하는 동안 나는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임용 절차 끝의 결과는 10년 후배의 임용이었고 나는 정권이 바뀌는 데 오도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원장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YS가 청와대를 접수한 후 나는 공보 비서실 경제 문고 담당 비서관으로 앉아 있었고, 다른 <언어>를 쓰는 <민주화 운동 세력> 틈에서 벌쭘한 입장이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당시 YS 초대 공보수석 이경재 씨(현 한나라당 강화 출신 의원)는 “함께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청와대 앞길 개방' 조치로 사무실 가까이서 들리는 택시 엔진 소리에도 적응이 어려웠다.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YS가 취임한 지 두 달이 넘어가던 1993년 5월 5일 어린이 날, 관례대로 청와대 경내 녹지원에는 어린이 들이 초청돼 대통령 부부와 기념 행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출근하자 말자 공보수석이 불러 가보니 “나는 곽 비서관과 함께 일하려 했으나 나보다 센 사람이 대기 발령을 낼 것”이라고 통고하면서 답답한 듯 사무실 천정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는 그 센 사람이 인사담당 홍XX 총무 수석인 줄 짐작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것이 대통령 아들 XX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 아들이 자기가 모른는 사람은 솎아내고 자기 사람들로 청와대를 채우고 있었다. YS 말기 그가 구속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실감했다. 

내 사무실을 대신 차지한 사람은 YS의 통역을 맡을 박진(현 한나라당 종로구 의원)이었고, 나는 짐을 챙겨 청와대를 나왔다. 집에 오니 가족들 볼 낯이 없고, 바깥으로 나와도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자주 가는 작은 호텔 사우나에 가니, 바쁠 때는 좀 더 있고 싶었던 그 곳에 한 시간이 지나니 할 일이 없었다. 실직자들이 산을 찾는다지만 등산도 해 본 놈이나 하지…

갈 곳을 수소문해 보니 정권 초기에 대충 인사가 끝나 내 직급에 맞는 자리는 없었다. 이경재 수석이 주선해 준 종합유선방송위원회의 관리국장 자리는 서기관 급이었지만 집에서 허송세월 하는 게 싫어 출근을 시작했다. 약 2 주일의 백수 생활도 일중독자에게는 길었다. 경찰청 앞 순화동 사무실에 나가니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궁궐에서 저자 거리로 쫓겨난 기분이랄까.

저자 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는 나날을 보내던 중 "석사 학위나 하나 더 하라"는 가족의 권유로 야간에 제일 가까운 연세대의 언론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2년 후 취득한 석사 학위가 후일 모교에 임용돼 <언론학 박사>를 하게되는 계기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관리국은 처음 시작된 케이블 TV를 위한 프로그램 공급업자(PP)를 심사하는 일이 주무였고 나는 12월까지 그 업무를 총괄해 아무 문제없이 끝내고, 1994년 1월 PP 중 하나로 선정했던 뉴스 채널 YTN으로 또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뒤숭숭한 세월에 직장에서 밀려났다는 사람들 소식을 들으면 그 때 생각이 난다.                             
 



 

 
 
 

고학생 (2008-12-28 20:00:19) 
 
교수님도 이런 시련을 거쳐 현재의 지위에 오르신거였군요.
설마 통역대학원까지 졸업한 분이 백수생활을 하셨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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