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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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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1-08 19:20 조회4,0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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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타고 난다’는 것

2011.1.10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중철

 폴 포츠, 수전 보일, 허각, 존박... 국내외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뽑혀 우리 귀에 익은 이름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재능을 드러내는 순간의 녹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난다. 현재 진행 중인 모 공중파 TV오디션에서도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내리기도 전, 내 귀에, 그리고 내 눈에 ‘팔자처럼’ 노래 잘하는 후보자를 볼 때마다 찌릿하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노래뿐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남보다 월등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우리는 ‘타고 났다’고 한다. 박지성이 그렇고, 신지애, 박찬호가 그러며 김연아, 추신수가 그렇다. ‘타고 났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몇 년 전 한국 프로농구의 S감독은 최고 득점상을 받은 자기 팀의 J 선수를 칭찬하면서 “드리블과 패스는 선수들이 열심히 연습하면 엇비슷하다. 그러나 골 앞에서 슛하는 순간 J는 다르다. 그는 슛쟁이로 태어났다”고 했다. 박지성이 수많은 수비수들을 제치고 문전으로 쇄도할 때가 그렇고, 신지애가 러프를 탈출하며 어프로치 샷을 홀 컵에 붙일 때가 그러며 김연아가 트리플 점프를 할 때가 그럴 것이다.

통역에도 타고 난 인재들이 있다. 통번역대학원에서는 평균 1년에 한 두 명이 내게 타고났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어릴 때 외국생활을 많이 해 다른 학생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재빨리 간파하고,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름을 눈치 채 1-2초 만에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다른 말로 옮기는 것을 들으면 ‘타고 났구나’하고 느낌을 받는다. 그런 통역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더 듣고 싶어진다.

매년 연말의 입시 면접에서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는 그런 수험생을 보면 찌릿한 감동을 느끼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특히 여성이 더 우수한 자질을 보이는 통역에서 남학생이 그런 자질을 보일 때는 더 반갑다. 면접 시험을 볼 때 그렇고, 국제회의에 배치한 졸업생들이 무대공포감을 떨치고 야무진 통역을 할 때 가슴이 뭉클해 진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 시대에 통역에 가장 중요한 모국어가 무시되고 영어 교육이 우선시되면서 한자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런 인재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작년 G20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정부의 고위관리 몇 사람이 최근 "영어만 잘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G20 회의를 위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오히려 영어만 잘해선 소용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한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G20 회의 때 썼던 내 영어는 사실 콩글리시(한국식 영어)"다. 자신감 있게 말했더니 콩글리시도 모두 이해하더라. 매끄러운 회의 진행을 위해선 유창한 영어보다는 축적된 경험과 알맹이 있는 발언 내용이 더 중요했다. 경험과 배짱이 쌓이면 못 할 일이 없다. 한국에서 배운 토종 영어라도 자신 있게 얘기하면 모두 알아듣는다. 그래서 각국 재무장관들이 모인 국제회의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한 관리는 "G20 정상회의 준비를 위해 해외 유학을 다녀왔거나 해외에서 직업을 가진 민간인을 채용했는데, 정부 일이라는 게 영어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실제 겪어보니 영어만 잘하는 인재로는 일 맡기기에 부족하고, 행정 경험과 우리나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인재여야만 일을 제대로 처리하더라. 외국에 나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학을 영어로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인재를 국내에서 부모 밑에서 키워야 한다. '토종 영어 인재'의 육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몇 년 전 조선일보에 기고한 ‘이명박 영어를 통해 본 영어학습 비결’, ‘김연아 영어 단상’ 등의 기고문을 통해 자녀 교육에 중요한 것은 영어 조기 학습이 아니라 자녀들이 타고난 재주를 살려주는 것임을 강조해 왔다. 물론 “내 자식이 노래도, 스포츠에도 타고난 재주가 없는 둔재일 때는 어떻게 하나?”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식에게 타고난 재주를 살릴 시간도 주지 않고 모두가 달려드는 영어교육에 덩달아 올인 하다가 타고난 재주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박지성이 타고난 축구의 재주를 뒤로 하고 영어 공부를 먼저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0세도 안돼 조국의 월드컵 유치를 위한 발표장에서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었을까?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을 포기하고 조기 영어 유학을 떠났다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자리에서 유창하게 영어 인터뷰를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타고난 재주를 먼저 계발해 1인자가 되고 나면 그 자신감으로 영어는 훨씬 더 쉽게 터득할 수 있다.

통역사를 양성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타고난 재주가 외국어라면 그 자질을 타고난 자가 외국어를 공부하고 통번역대학원에 응시해 통역사가 되는 것이 자신과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물론 특별한 타고난 재주만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그 방면의 달인이 될 수는 없다. 부단한 노력으로 그 재주를 갈고 닦아야 한다. 물 위에 떠있는 오리가 부단히 물갈퀴를 놀려야 하듯이 남들이 모르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타고난 통역사라도 회의 전 열심히 자료를 연구하고도 통역 직전에는 불안한 긴장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런 통역사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잘났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재능 중 그 하나를 타고 난 것뿐이다. 그런 재주를 타고난 자는 다른 약점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뛰어난 통역사 중에는 운동 신경이 없거나 방향감각이 전혀 없어 길 눈에 어두운 자가 많다. 조물주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재미있고,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학기 나는 대학원 1학년 학생들에게 “나는 통역사로 태어났는가?”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쓰게 했다. 과연 통역이란 어떤 것이고, 번역과 어떻게 다른가를 스스로 깨치게 하기 위한 숙제였다. “타고 나지 않은 자는 통역을 포기하란 말인가?”라는 일부의 반발 속에 제출된 리포트의 대부분은 “내가 통역사로 타고 났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훌륭한 통역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답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답이기도 하다.  ‘대기만성’이란 말이 있듯이 길고 짧은 것은 두고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TV에서 오디션을 받으며 타고난 노래 재주를 선보이는 가수 지망생들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오는 새 학기에는 또 어떤 제자가 타고난 통역사의 자질과 노력을 보여줄까 기대하면서 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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