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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誤譯)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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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Q.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1-10-22 00:00 조회3,7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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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오역(誤譯)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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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天高馬肥)라면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니 책이라도 한 자 읽으라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역이 또 가당치도 않다. 이 말은 본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었으니 반드시 오랑캐들도 지금쯤은 우리를 쳐들어 올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즉 국방에 더욱 마음을 쓰자’는 뜻이었다. 오랑캐들의 침입이 말이 살찌는 가을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이없이 책 좀 읽자고 뒤바뀌었는데 중국의 식자들 앞에서 아는 체하느라고 우리 식으로 천고마비의 계절 운운 하니 저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옷깃을 뿌리치고 돌아선다’고 할 때 ‘袂別’이라고 쓰고 몌별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그 몌자가 쓰기도 어렵고 발음도 고약해 이제는 모두들 결별이라고 읽고 아예 글자까지 ‘訣別’이라고 고쳐 쓰고 있다.

요즈음 한국인의 왕래가 빈번한 중국의 경제특구인 ‘深쉌’도 ‘심천’이 아니라 ‘심수’가 맞다. 그런데 그곳에 가는 한국인들이 모두 ‘심천’이라고 오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이제 한국인들과 얘기할 깨는 아예 ‘심천’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영어가 보편화된 시대에도 영어의 오역도 흔히 있다. 1957년 10월에 소련은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 그해에 소련의 대권을 잡아 수상이 된 흐르시초프는 기고만장했다.

그는 ‘스푸트니크가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났으므로 이제 지구가 전보다 더 가벼워졌다’고 익살을 부렸다. 이 말이 외신(外信)을 타고 영문으로 “Now, the earth became lighter than before”라고 텔렉스로 들어왔다. 그때 국내의 ○○통신의 외신부장은 위의 문장을 ‘별(인공위성)이 떴으므로 이제 지구는 전보다 더 밝아졌다’고 번역하여 각 신문사에 송고했다. 하지만 ‘light’는 빛이 아니라 가벼움이란 뜻이었다.

일전에 세계 펜(PEN) 클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천하의 시객(詩客)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술이 들어가자 비위 좋은 한 한국 시인이 한국어로 즉석 시를 낭송했다. 그런데 이 자리가 국제적인 모임인 만큼 누군가 이 시를 영어로 동시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한국의 시인 중에서 영어라면 한 가닥 하는 분이 앞에 나섰다.

보통 연설이나 회화가 아니라 시를 동시 통역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싯귀 중에는 ‘꽃잎이 하늘하늘 나르고…’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하늘하늘’에서 막혔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Blossoms fly from sky to sky’라고 번역해 알 만한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오역사에서 가장 애교에 넘치는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국사학에서 씻을 수 없는 오역은 ‘高麗’,‘高句麗’를 고려와 고구려로 오독한 것이다. 이는 ‘고리’와 ‘고구리’로 읽어야 옳다. 조선 시대까지도 ‘麗’를 ‘리’로 읽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와 ‘려’로 읽기 시작한 것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려’로 읽고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이 미심쩍은 독자들께서는 큰 옥편에서 ‘麗’ 자를 찾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시 번역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번역을 하면서 진실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오역의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 번역(重譯)의 부도덕성과 비성실성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편견 없이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번역도 창작과 같은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지적(知的) 풍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바로잡습니다▼

마태복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구절의 헬라어 낙타(Kamelos)와 밧줄(Kamilos)의 혼동은 성경 원전의 기록에 관한 문제이지 성경 번역과는 관계없는 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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