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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man---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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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9-22 17:09 조회1,10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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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통역 '통김'의 정상회담 뒷얘기--중앙일보 2006.05.22  (발췌)

◆ 오해 많이 산 부시식 표현=부시 대통령은 2001년 정상회담 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호칭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논란이 많았다. 부시가 한국 대통령을 우습게 봤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부시는 평소에도 'man'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부시 대통령이 즉흥적이라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선 '죽이든 살리든(dead or alive)' 데려오라고 했다. 옛날 서부시대에 현상 수배범에게 사용했던 문구다.
그에 대해선 다른 사람도 아닌 영부인 로라 여사가 "대통령이 왜 그리 점잖지 못한 용어를 사용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부시 대통령은 또 "내가 텍사스 출신이라 해서 쌍권총으로 아무나 쏜다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2001년 정상회담 때 나는 'this man'이라는 부시의 발언을 '이 분은'이라고 통역했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첫 번째 정상회담을 할 때도 노 대통령을 지칭해 "He is an easy man to talk to"라고 했다. 나는 "말하기가 쉬운 상대"라고 통역하면서도 순간적으로 한국에서 문제 삼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에선 "말 상대가 편안한 분"이라고 바꿔 말했다.
 '쉬운 상대'라는 부분에 대해 문희상 당시 비서실장이 통역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불쾌해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도 'easy m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새겨둘 대목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얘기하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발췌)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2001년 3월6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미국을 방문했다. 3월8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신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의 정책 기조는 ‘클린턴이 해놓은 것은 모두 부정한다’였다. 네오콘(신보수) 강경파인 부통령 딕 체니와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백악관의 대외 정책을 좌지우지했다. 미사일방어(MD)시스템 개발 명분을 세우려고 북한의 위협을 들먹였다. 김대중과 부시의 정상회담은 순조롭지 못했다.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김대중의 말을 가로채는가 하면 한국 대통령을 ‘이 사람’(디스 맨)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당시 국무부 부장관이던 리처드 아미티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지식함과 무지, 외교력 결여, 한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빚어진 실수였다. 준비되지 않고 지독하게 교만한 텍사스 출신 카우보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만났던 것이다. 회담은 거기서부터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김대중은 모욕감을 느꼈다. “회담이 끝난 뒤 남편이 몹시 불쾌해했어요. 우리 국민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지요.” 이튿날 김대중은 온건 보수파인 부시의 아버지(조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전임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도 전화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중략)
2002년 1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 긴장의 파고가 높아졌다. 2월20일 부시가 한국을 방문했다. 부시는 1년 전의 오만한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김대중은 정상회담 1시간40분 동안 부시를 설득했다. 회담이 끝난 뒤 부시는 김대중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합니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습니다.” 한•미 정상은 휴전선 앞 도라산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부시에게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부시는 철도 침목에 기념 서명을 하고 “우리는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도라산역을 둘러보고 나서 부시 대통령의 태도가 확 달라졌어요. 남편을 존경한다는 말도 했지요.”

2001년 3월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 때 김대중을 ‘디스 맨’으로 홀대했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2월20일 한국을 방문해 함께 도라산역을 시찰한 뒤 햇볕정책 지지와 더불어 김대중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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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철님의 댓글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문화일보 게재 일자 : 2022년 10월 04일(火)
진짜 ‘친북’ 외교참사들/ 이도운 논설위원
외교에서는 늘 크고 작은 실수가 발생하지만, 정상 외교의 실패는 ‘참사’가 될 수 있다. 한국 외교 최악의 참사 가운데 하나는 2001년 3월 8일 워싱턴에서 일어났다.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러버린 것. 회담에서 김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라며 협상을 요청했는데, 부시 대통령은 인민을 굶기고 잔혹하게 탄압하는 사람이라고 받아쳤던 것. 이때부터 미 조야에서는 한국 정부의 낭만적 대북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 13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북한의 핵 보유가 자위적 수단이라는 데 일리가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유가 반드시 누구를 공격하거나 테러를 지원하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한국 외교부는 난리가 났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급히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화에 나섰는데, 오히려 파월은 담담했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노 대통령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북한은 2년 뒤 첫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중·일·러·남한 등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군사대국 5개국이 약소국 북한의 핵 포기를 압박했던 6자회담이 실패한 이유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에서 드러났다.
이듬해 11월 27일 경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노 대통령조차 놀라는 참사가 일어났다. 양국 대통령은 북한 달러 위조를 놓고 충돌했는데, 부시 대통령은 슈퍼 노트(정밀 100달러 위조지폐)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고, 부시 대통령은 “있지 않으냐”고 답했다. 노 대통령은 “증거가 어디 있냐”고 되물었고, 부시는 “당신들이 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당황해서 참모들을 돌아봤다. 미국에도 준 정보를, 친북 참모들이 노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던 것.
외교 참사는 대통령의 정책이 현실을 외면할 때 발생해 왔다. 그래서 북한을 옹호하는 진보 정권에서 잦았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외교 참사는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순방의 실무적 실수를 참사로 모는 것은 기가 막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