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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사무총장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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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7-11-09 18:31 조회6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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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사무총장 통역

2017 8 17, 브뤼셀 나토 본부 통번역부에서 나토 사무총장이 10 31일에서 111일까지 한국에 가는데 통역을 해줄 수 있냐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 달에 한 번쯤 국제회의통역사협회 AIIC 회원명단을 보고 해외에서 섭외가 오는데 학교에 메인 몸이라 사양하거나 후배들한테 넘기는대 한국의 요율을 제시하면 놀라서 상대방이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큰 기대는 않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한참 잊고 있었는데 9 15, 방한일자가 11 1일부터 2일까지로 확정됐다면서 계약을 맺자고 했다. 드문 경우라 내가 남자라서 뽑혔나?” 의아해하면서 준비를 시작했다. 10명이 넘는 한국인 AIIC 회원 중 내가 청일점이기 때문이다. 그 때 기억난 것은 1980년부터 3년간 유학한 파리 3대학 통번역대학원 캠퍼스가 파리 서북쪽에 있는 뽀르트 도핀Porte Dauphine에 있던 전 나토본부 건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 프랑스 통역학장이 이 학교의 동시통역 시설이 1960년대 말  나토 사람들이 쓰던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건물 3층의 7호실Salle 7에서 강의를 듣고, 졸업시험을 치고 졸업했는데, 2005년에는 그 교실에서 열린 세계통번역학교협회CIUTI 총회에 참석했었다. 2006년 차기 총회주최자로서 연설하면서 바로 이 교실이 내가 통역입문 강의 등을 들었고, 저 오른쪽 첫 부스에서 동시시험 통역을 했다고 하니 외국 대표들이 감탄했었다. 그 교실하고만 인연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토와도 인연이 있었구나! 내가 통역할 놀웨이 총리 출신 나토 사무총장 스톨텐버그라는 사람은 나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그가 서울에 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Global challenge necessitates global response. 최근 북한이 시험 중인 장거리 미사일은 유럽을 사정권 안에 두고, 심지어 동유럽은 미 본토의 서해안보다 더 가깝다. 유럽은 강력한 억지력으로 북한의 위협을 막아낼 것이며 나토 조약 5조에 의해 9/11 사태 이후처럼 동맹국인 미국이 공격을 받아도 자동 개입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유지해야한다. 나토는 대한민국 편이다"    

 

계약 절차를 끝낸 10 18, 담당자는 Ms. Lee라는 통역사가 나와 통역을 분담할 것이라고 통보했는데 통대 1기 동기에 나이도 동갑인 이상숙씨였다. 한국통번역사협회KATI 에서도 나 직전에 2기 회장을 지낸 고참이었다. 나토는 또 총장이 국립묘지 헌화를 하는데 우리 중 하나가 현장을 가보라고 해서 흑기사 정신으로 자원해 10 24일 차를 몰고 현충원을 방문해 헌화 절차를 익히고 왔다. 재미있었다.

내가 헌화행사와 청와대 예방행사를 맡고 국회 예방 오찬과 DMZ 방문행사는 이상숙씨가 맡게 되었고, 아산연구재단 행사 후 기자회견은 동시를 함께 하게 되었다. 청와대와의 인연도 이어지는가, 내가 청와대를 떠난 것이 1993 5월이니 24년 만에 다시 청와대 통역을 하는 셈이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11 1일 오전 김포공항에서 나토 대표단을 만나 모터케이드로 이동, 남산 하야트 호텔에 함께 체크 인 후 국회와 외무부를 거쳐 이상숙씨와 무교동에서 소주 한잔에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와 잤다. 다음 날 새벽 이상숙씨는 DMZ로 떠나고 나는 9시쯤 숙박비에 포함된 늦은 조찬을 먹고 체크아웃 후 청와대 들어갈 준비를 했다. DMZ를 갔다 온 총장을 미 8군 드래건 힐 식당에서 만나 다시 모터케이드로 두 시 정각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청와대 본관도 나와 인연이 깊은 건물이다. 1991년 가을 개관한 본관은 사실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계시던 나의 삼촌이 설계/건축을 총괄한 바 있다. 개관식에서 삼촌과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그로부터 20032월까지 대통령 통역을 그 건물에서 하다가 5월에 청와대를 떠났으니 24년만이었다.

레드카핏을 따라 2층 대통령 집무실 옆 접견실로 들어가니 기억이 새로웠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건물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었던것이다. 바로 그 공간이 며칠 후 방한할 트럼프 미 대통령이 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장소였다. 한가지 바뀐 게 있다면 양 정상 뒤 두 통역사의 의자가 동그란 좌석의 노란 간의 의자로 준비돼 있었다. 처음 본 문대통령의 모습은 TV에서 보던 수수한 얼굴 그대로였다. 나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그는 발음은 또렷하지 않아도 메시지는 능란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사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문대통령 통역은 언론보도에서 낯이 익은 외무부의 김종민 사무관- 40대 초반이라니 나보다 20살 이상 젊었고 조카 나이였다. 나도 38살에서 40세까지 청와대에서 통역했는데...   

좌우로 양측 대표단이 앉았는데 좌측에는 국가안보실의 실장과 1, 2 차장, 주 벨기에 대사 등이 앉았다. 영어를 알아듣는 그런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통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목소리는 24년 만에 떨리고 있었다. 사투리 억양이 들어간 내 통역을 우측 1미터 앞에서  듣던 문대통령은 두 세 차례 나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눈길로 이 사람은 누군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하는 노트테이킹도 여의치 않았지만 준비했던 대로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통역했고 접견은 40분 정도 후에 끝이 났다. 안보실 1차장의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며 얼른 1층으로 내려와 경희궁 옆 아산정책연구원으로 가는 모터케이드의 버스에 올라탔다. 연구원에서 양측 대담 이후 열린 사무총장 기자회견은 30분 가량 진행되었는데 이상숙씨와 좋은 팀웍으로 무사히 동시통역을 마쳤다. 계약한 대로 거기서 통역사들은 RELEASE 되었다. 연구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이상숙 씨를 서울역에 내려주고 내 차가 주차해 있는 하야트 호텔로 가면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내가 64살의 나이에 24년만에 한 청와대 통역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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