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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 40년의 마지막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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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8-02-05 18:10 조회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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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 40년의 마지막 임무  

1980년부터 83년까지 내가 만 3년 유학한 파리3대학의 통번역대학원(ESIT)은 돌이켜 생각하면 참 고마운 학교다. 학교에 다닐 때는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고 나한테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원망했지만 그건 지나친 이기적 기대였다. 우리정부나 우리학교에서 그 학교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학교에 매 학기 낸 돈이라고는 5만원 가량 되는  학생자치 회비 뿐이었다. 우리 정부는 한달 500달러의 장학금만 내게 보내주면서 그 학교에 국제협력의 정신으로 공부시켜달라고 뻔뻔하게 요청한 셈이었다.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 개도국에서 온 학생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데도 퇴학시키지 않고 3년이나 무료로 공부시켜 수준에 이르게 해 통역 자격증과 함께 졸업시켜준 것은 프랑스라는 대국이 표방한 박애정신(fraternity)의 실천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나는 귀국 후 1년만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통역안내과장이 되어 후배들 10명을 보내면서 내가 확보한 넉넉한 체육부의 예산을 그 학교에 보내 보은했다. 재정난에 빠져있던 그 학교 운영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원장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최초의 번역학자 중 한명인 다니엘 셀레스토비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큰 예산을 들여 해외 통역사와 번역사 각 50명을  초빙해 일을 시켰고 행사가 끝나자 말자 그들의 추천으로 나는 한국 최초의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이 되었다. 그 때의 외국인 수석통역사(Bernard Ponette)는 그 후에도 한국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회의에서 동료 통역사들과 함께 와서 나를 도와 성공적인 통역을 가능하게 했다.

20년에 가까운 통역현업 이후 모교인 통역대학원에 와서는 통번역 학자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2000년부터 5년간 우리 교육부 자금으로 미국의 몬트레이와 호주의 맥쿼리 대학원에 제자들을 보냈고 2005년 국제통번역학교협회(CIUTI)의 회원교가 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교수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6년 내가 통역대학원 원장이 되어 서울에서 동 협회의 총회를 주최하였다. 50명이 넘는 유럽 중심의 세계통역학교 대표들을 초청한 행사는 아주 힘들었지만 이후 국제협력의 계기가 되었다. 서울 총회에서 나는 협회의 이사라는 감투도 썼다.   

어찌 보면 국제협력은 성가신 일이다. 그냥 국내에서 통번역을 하고 통번역을 가르치면 쉽게 살 수 있는데 국제협력을 하려면 예산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통번역으로 생활비에 보태고 논문 쓰고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들은 사실 시간이 모자란다. 또 해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출장비도 받기 어렵다. 그래서 가장 선배인 내가 200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연례총회에 참석했다. 프랑스, 벨기에, 이태리, 독일, 중국, 스페인, 러시아의 통번역학교로 출장을 다녔다. 논문발표가 있어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도 항공기 승급에 내 돈을 보태가면서 비행기를 탔다.

20155월 모스크바 CIUTI 총회에서 초대 손님으로 온 국제번역사연맹(FIT) 회장(Henry Liu)을 우연히 만나 내가 한국통번역사협회(KATI)의 회장이라고 했더니 연맹 가입을 권유했다. 학교는 FIT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해 KATI 요원들과 준비를 시작해 그 해 말 KATI는 한국 제2의 회원 단체가 되었다. 2016년 말 아태지역번역사포럼(APTIF)을 이끄는 중국번역사협회(TAC)로부터 2019년 제9 APTIF 행사를 주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고민에 빠졌다. 출범한 지 얼마 안된 KATI가 그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이라면 내가 정년을 이미 1년 넘긴 시점이어서 더욱 문제였다.

며칠 생각해보니 2019년은 우리학교가 개원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어떤 식으로든 기념행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APTIF 만한 행사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중국 측에 “KATI와 우리 학교가 공동주최하겠다고 조건을 걸었고 승인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동료교수들의 동의를 받는 일이 큰 과제였다. 중국 등지에서 번역관련 인사 수 백 명이 오는 행사를 치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동주최라는 동업이 가져올 혼란도 예상되었다.

그렇지만 결심을 굳힌 나는 교수들을 설득했다.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통역대학원인 우리가 개원 40주년을 맞아 그 동안 소홀히 해온 국제협력을 본격화할 수 있는 최적의 행사다. 금년(2018) 8월 은퇴할 내가 사심 없이 힘을 보탤 테니 용단을 내려달라”. 교수들은 다수결로 어렵사리 동의를 했고, 나는 교수 두 명과 KATI 요원 1명과 함께 2016년 여름 중국 산시성(山西省, Shanxi) 성도 시안(西安, Xian)에서 열리는 8APTIF 출장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서울 시로부터 국제행사 준비금 일부를 지원받아 4명의 출장비를 마련하고 포럼 유치 지원 팸플릿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이 있는 천 년의 고도 시안은 내가 자주 간 베이징과 상하이과는 다른 아름다운 도시였다. 시내의 고급호텔에서 열린 포럼은 중국의 힘과 부를 보여주는 화려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특히 호텔 그랜드 볼룸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인상적이었다. 3년 후 2019년 여름 우리학교 강당인 오바마홀에도 저런 스크린을 설치하기로 마음 먹었다, 포럼 마지막 날 스크린 밑에서 대회기를 넘겨받고, 폐회식에서 준비해간 슬라이드로 서울과 우리 학교, 그리고 KATI를 소개했다. 맺음 말에서 행사 주최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정한 이상 대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 박수를 받았다. 그 연설이 강한 인상을 주었던지 2017 8월 초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린 FIT 총회 결산 이사회에서 나는 뜻밖에도 17명 이사 중 신임으로 선출되었다.

2017APTIF는중국이 FIT의 후원으로 주도해온 행사이니 만큼 중국의 참여와 적극적인 지원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2017년에 벌어진 사드 사태로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를 급감시키자 나는 고민에 빠져 TAC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그들은 변함없는 협조를 다짐했다. 201712월 초 시진핑 주석의 방침에 맞춰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번역 포럼에 나를 초대해 논문을 발표할 기회도 주었다.

이제 한국의 1세대 통역사인 나에게 남은 과제이자 마지막 임무는 2019년 행사를 준비할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다. 외국인과 내국인 참석자에게 적지 않은 행사 참가비를 받고 서울 시 등에서도 지원금을 받겠지만 개원 40주년인 만큼 그보다 앞서 학교 당국의 예산 지원이 필수적이다. 예외 없이 우리 대학도 재정난에 빠져있지만 최소한의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야 마음 편히 학교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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